21 김해월(金海月)

페이지 정보

본문

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무을면
효부(孝婦) 김해월(金海月) 49세

김해월(金海月) 효부(孝婦)는 일제말기(日帝末期)인 1944년(年) 당시(當時) 16세(歲) 어린 나이로 남정호씨(南廷浩氏)와 결혼(結婚)하여, 극빈(極貧)한 가정(家庭)에서 홀 시부(媤父)님과 당시(當時) 10대(代) 후반(後半)의 어린 시(媤)동생과 함께 남편(男便)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오던 중, 불행(不幸)하게도 결혼(結婚) 3년(年)만인 1947년(年) 뜻밖에 남편(男便)이 세상(世上)을 떠나니, 그 비통(悲痛)을 어디에다 비(比)할 것인가? 

노동력(勞動力) 없는 세 식구(食口)가 살아가자니 암담(暗澹)하기만 하였다. 

시부(媤父)님은 자식(子息)잃은 상심(傷心)에 병(病)까지 겹쳐서 자리에 눕게 되니 한한(漢漢)한 심회(心懷)를 금(禁)할 길이 없었고, 아울러 자신(自身)의 곤경(困境)은 불순(不順)하고 불쌍한 시부(媤父)님과 어린 시(媤)동생의 장래사(將來事)가 말이 아니었다. 

이 때 궁색(窮塞)한 시댁(媤宅)의 가운(家運)을 만회(挽回)하기 위해서는 굳은 결의(決意)와 신념(信念)이 요청(要請)되었는데, 김여사(金女史) 스스로가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하겠다는 굳은 각오(覺悟)가 용소슴쳤던 것이다. 

병상(病床)에 계시는 시부(媤父)님을 극진(極盡)히 간호(看護)할 때 밤을 지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덧 1년(年)의 세월(歲月)이 흘러 시부(媤父)님의 병(病)은 쾌유(快癒)되었으나, 약(藥)값 등 부채(負債)로 가난한 집안은 더욱 곤궁(困窮)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實情)을 인근(隣近) 동리(洞里)에서 본 이마다 그 여(女)의 시부(媤父)님에 대한 효행(孝行)과 망부(亡夫)에 대한 열행(烈行)에 감탄(感歎)하여,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라지 않고 모두가 김여사(金女史)를 효부(孝婦)이자 열녀(烈女)라고 칭호(稱號)하게 되었다. 6.25사변(事變)을 전후(前後)하여 당시(當時)의 우리나라 농촌(農村)의 식양사정(食糧事情)은 말이 아니어서, 춘궁기(春窮期)에는 거개의 농민(農民)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한 바 있다. 

그렇게 어렵던 시국(時局)에 여사(女史)의 행적(行績)에 감복(感服)한 동민(洞民)들은 돈과 쌀을 거출(據出)하여 구원(救援)을 하였으니, 그의 독행(篤行)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느덧 사랑하는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지 5년(年)이 흘렀는데, 김여사(金女史)의 나이는 인생(人生)의 청춘(靑春)을 꽃피울 방년(芳年) 21세(歲)가 되었다. 

이 때 어느 날 시부(媤父)님과 남씨(南氏), 문중(門中)여러 어른들이 모여 의논(議論)하여 말하기를 혈육(血肉)하나 없이 청춘(靑春)을 홀로 늙게 할 수 없다며 개가(改嫁)를 권(勸)하는 것이었다. 

인정(人情)은 고마우나 나 혼자 잘살겠다고 그 뜻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릴 때의 가정교육(家庭敎育)에서 몸에 밴 바대로, 한 여자(女子)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박행(薄幸)한 시부(媤父)님과 어린 시(媤)동생을 또한 저버릴 수 없다 하며 냉정(冷靜)하게 사양(辭讓)하였던 것이다. 

그 후(後) 부군(夫君)을 대신(代身)하여 지게도 지며 밭도 갈고 남자(男子)가 할 일,  여자(女子)가 할 일을 가리지 않고 가정(家庭)을 꾸려나가, 어린 시(媤)동생을 키워서 장가보내어 장질(長姪)을 양자(養子)하여 오늘까지 살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무등동민(茂等洞民)들로부터 새마을 부녀회장(婦女會長)으로 추대(推戴)되어, 재임(在任) 7년간(年間) 부녀회(婦女會)의 기금(基金)을 살려 동사건립(同舍建立), 간이상수도시설(簡易上水道 施設) 등 많은 사업(事業)을 남겼는데, 1973년(年)에는 당지(當地) 면장(面長)으로부터 새마을 사업(事業) 유공표창장(有功表彰狀)을 받은 바 있다.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은, 타락(墮落)되어 가는 오늘날 부도(婦道)의 세태(世態)속에서 뭇 사람들의 거울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