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순연(金順連)

페이지 정보

본문

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약목면
효부(孝婦) 김순연(金順連) 30세

기본재산(基本財産)이라고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草家) 한 칸, 이것이 김순연(金順連) 여사(女史)가 시집간 남편(男便)의 가산목록(家産目錄) 제1호(第1號)였다. 

남편(男便)의 직업(職業)도 철로(鐵路)에서 품삯 일을 하는 막 노동자(勞動者)여서, 뭐 하나 행복(幸福)의 고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신혼(新婚)의 꿈은 그런대로 밝은 편(便)이었다. 

그런데, 결혼생활(結婚生活) 3년(年) 만에 남편(男便)은 철도사고(鐵道事故)로 사망(死亡)하는 비극(悲劇)을 맞게 됐다. 

그 때 나이 23세(歲) 하루아침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김 여사(女史)는, 시모(媤母)님과 세 살짜리 어린 자식(子息) 그리고 뱃속에 든 유복자(遺腹子)들을 무슨 힘으로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할까 하는 절망감(絶望感)에 빠져,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契機)로 삼아서 더욱 굳건히 살아가기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세 살 난 아이와 젖먹이 유복자(遺腹子)는 시모(媤母)님께 말기고, 이 골짝 저 골짝을 누비면서 화장품(化粧品) 외판(外販)을 했는가 하면, 시간(時間) 틈틈이 홀치기감을 이 집 저 집 배달(配達)해 주는 등, 누가 보나 또 순이라고 말할 정도(程度)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熱心)히 뛰었다. 

틈틈이 눈여겨 본 홀치기에도 이제는 자신(自信)이 붙어, 낮에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화장품(化粧品) 외판(外販)으로 마라톤을 하는 한편, 밤에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손마디가 저리도록 홀치기(作業)를 했다. 

그러니 잠을 잔다는 것은 고작 시간(時間)일 뿐,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마을 아낙네들이 그를 가리켜 "또순이 언니'라는 별명(別名)까지 붙여 주었으랴.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나 할까. 온갖 고생(苦生) 끝에 행상(行商)을 한지 5년 후(年後)에는 초가(草家)가 스트레스 변신(變身)되었고, 그 후(後) 다시 2년(年) 만에 꿈에도 그리던 저금통장(貯金通帳)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홀로 계시는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시면서 두 자녀(子女)도 알뜰히 키워 나가고 있다. 

행상(行商)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릴 때, 간혹 혼자 몸으로 이렇게 살겠느냐고 하면서 이런저런 달콤한 유혹(誘惑)도 많이 받아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앞에서 다시 그런 말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심더, 나의 남편(男便)은 무덤에 잠드신 그이 한 분 뿐이라 카이예" 

끈질긴 유혹(誘惑)의 손길이 뻗쳐올 때마다 김여사(金女史)는 이와 같이 쏘아붙이면서, 일편단심(一片丹心) 수절과부(守節寡婦)로 그의 인생(人生)을 지켜 나갔다. 

지금은 큰아들이 고교(高校) 3학년(學年)의 어엿한 청년(靑年)으로, 그리고 당시(當時) 뱃속에 들어있던 유복자(遺腹子) 역시 고교(高校) 1학년(學年)의 배지를 달고 저마다 열심(熱心)히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여러 개의 저금통장(貯金通帳)을 손에 쥐어 보는 것이 그의 소망(所望)이라는 김여사(金女史)는, 행상(行商)을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그는,"정신 도하사불성"(精神 到下事不成"이란 명언(名言)을 입속으로 되뇌면서 외출(外出)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