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순연(金順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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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일군 대송면 송동
효부(孝婦) 김순연(金順蓮) 40세

김순연(金順蓮) 여사(女史)의 불행(不幸)은 하지마비(下枝痲痺)란 병마(病魔)에 시달리게 된 남편(男便)의 고통(苦痛)과 함께 비롯되었다. 

가정(家庭)의 기둥이었던 남편(男便)이, 하지(下肢)를 제대로 못 쓰는 불구(不具)의 몸이 되자 자연 노동력(勞動力)도 잃게 되었고, 따라서 그 무거운 짐을 김여사(金女史)가 짊어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늙으신 시부(媤父)님도 각별히 봉양(奉養)해야 하는 그는, 낮에는 품삯일, 그리고 밤에는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으로 어려운 살림을 이어 나갔다.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남편(男便)과 노령(老齡)에 접어든 시부(媤父)님을 어찌나 지성(至誠)스럽게 돌보아 왔던지, 동네에서는 그를 가리켜 효부(孝婦) 중의 효부(孝婦)라고 할 만큼 김여사(金女史)에 대(對)한 칭송(稱頌)은 대단하였다. 

10여 년 전부터(餘年前)부터 일절(一切)의 활동을 못 하고 있는 그의 남편(男 便)은, 날이 갈수록 신경(神經)이 칼날처럼 예민(銳敏)해져 정신적(精神的)으로나 육체적(肉體的)으로나 그를 괴롭히는 일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김 여사(金女史)는 너그러운 미소(微笑)로써 오히려 남편(男便)을 위로(慰勞)해 줄 뿐만 아니라 병(病)에 좋다는 약(藥)이라면 수백리(數百里) 길도 불사(不 辭)하고 달려가서 명약(名藥)을 구(求)해다가 따뜻하게 시탕(侍湯) 해 주는 뜨거운 정성(精誠)을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단 남편(男便)뿐만 아니라 시부(媤父)님에 대한 봉양(奉養)의 자세(姿勢)는 더욱 감탄(感歎)할 정도였다. 

낮과 밤을 잊을 정도로 중노동(重勞動)에 시달려 오면서도, 단 한 시도 자구안일(自求安逸)함이 없이 시간(時間) 틈틈이 시부(媤父)님 방에 찾아가서 안부(安否)를 묻는 것은 물론, 수시(隨時)로 시부(媤父)님께서 좋아하시는 탁주를 사다 드리기도 하며, 특히 시부(媤父)님께서 무연(無聯)하게 앉아 계실 때는, 세상(世上)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비단 불구(不具)의 남편(男便)과 시부(媤父)님에게만 효심(孝心)을 다 바친 것이 아니라, 동네 웃어른들에 대해서도 존경(尊敬)의 미덕(美德)을 아낌없이 실천(實踐)하였다. 

예(例)를 들면 빨래터에 나가서 세탁(洗濯)을 할 때, 노인(老人)들이 힘겹게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 면 그대로 놔두지 않고 대신(代身) 빨래를 해 준다든가, 또는 방아를 찧고 있는 할머니를 목격(目擊)하면 서슴지 않고 달려가 방아를 찧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가(代價)를 절대 바라지 않았다. 

비록 나간에 시달리고 남편(男便)이 병(病)들어 갖가지 어려움은 많았지만, 스스로 남을 도운 일에 대해서는 손톱만큼의 보상(報償)이라도 이를 사양하였다. 

웃어른을 존경(尊敬)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當然)히 사람이 해야 할 도리(道理)라고 말하는 그는 슬하(膝下)의 세 자녀(子女)에 대해서도 효도(孝道)화 우애(友愛)는 인(仁)의 근본(根本)이라는 효제위인지본(孝悌爲仁之本)의 참뜻을 입버릇처럼 타이르고 있는 엄(嚴)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신경(神經)이 바늘, 끝처럼 날카롭기만 하고 불구(不具)였던 그의 남편(男便)도,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극진(極盡)한 아내의 간호(看護)에 탄복(歎服)이 되어, 양(羊)처럼 가정(家庭)의 화목(和睦)을 위해 노력(努力)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