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장인득(張仁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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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송군 파천면
효부(孝婦) 장인득(張仁得) 43세

장인득(張仁得) 여사(女史)는 20세(歲)의 젊은 나이에 결혼(結婚)한 후, 불과 (不過) 2년(年)의 신혼생활(新婚生活)을 넘기고 불행(不幸)하게도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해야 하는 비운(悲運)을 겪게 되었다. 

남편(男便)이 없는 가정(家庭)에는 늙으신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이 남겨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당장 호구지책(糊口之策)이 막연하여 하는 수없이 품삯 일에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부모(媤父母)님 두 분 모두가 약속(約束)이나 한 듯 병상(病床)에 눕는 바람에 그의 손길은 더욱 바빠지기만 했다. 

그런 불우(不遇)한 생활(生活) 속에서 어느 새 대소변(大小便) 받아내는 일쯤은 식은 죽 먹듯이 잘도 해내게 되었지만, 맛있고 영양가(營養價) 있는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비록 두 분에게 평소 흡족할 정도(程度)의 값지고 맛있는 음식(飮食)은 대접(待接)해 드리지 못했지만, 간혹 품삯을 두툼하게 받은 날이면 돼지고기와 생선(生鮮) 등을 사다가 맛있게 조리(調理)하여 드리는 알뜰한 정성(精誠)을 받쳐 왔다. 

장여사(張女史)는 비단 가정(家庭)안의 시부모(媤父母)님 뿐만 아니라, 동리(洞里)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조촐한 음식(飮食)이나마 손수 대접(待接)해 드리는 일도, 한결같은 실행(實行)으로 경노효친(敬老孝親)의 뿌리를 온 마을에 깊이 내리게 하였다. 

무엇보다 장여사(張女史)는 새마을 사업(事業)이 전국적(全國的)으로 료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오를 무렵,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부녀사업(婦女事業)에 힘쓴 결과(結果), 마침내 동리(洞里)어머니 회장(會長)으로 추대(推戴)됐고, 다시 1978년(年) 에는 면전체(面全體)의 효녀사업(孝女事業)의 부녀사업(婦女事業)을 짊어질 면부녀회장(面婦女會長)으로 선출(選出)되기도 했다. 

'또순이'라는 별명(別名)이 붙은 그는, 매일(每日) 아침마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비를 들고 청소(淸掃)를 하는가 하면, 절식운동(節食運動)과 가족계획사업(家族計劃事業),1가족(家族),1통장(通帳) 갖기운동 등 각종 부녀사업(婦女事業)에 많은 사적(事績)을 남긴 바 있는데, 처음에는 과부(寡婦)가 바람이 나서 온 동리(洞里)를 누비고 다닌다느니,또는 암닭이 울면 집안에 망한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장여사(張女史)는 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남성(男性)들도 하기 힘든 이런저런 새마을 사업(事業)을 앞장서서 거뜬히 해치우자, 마침내 온 동민(洞民)들도 감동(感動)이 되었고, 나아가 우수(優秀) 자주(自主) 새마을로 승격(昇格)시키는 데 큰 몫을 해냈다고 한다. 

한편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난 외아들은 고등학교 교육(高等學校 敎育)까지 마려 사회(社會)의 훌륭한 일꾼으로 활략(活躍)을 하고 있다. 

장여사(張女史)는 평소 마을의 부여자(婦女子)들에게뿐만 아니라 단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오늘에 땀 흘려 일한 보람은 내일(來日)에 결실(結實)되고, 오늘을 놀며 즐기는 기쁨은 내일(來日)의 고역(苦役)으로 나타난다"고 역설(力說)하면서, 자동(自動), 자립(自立), 협동정신(協同精神)을 일깨워 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비단 자신(自身)의 웃어른들뿐만 아니라 모든 웃어른들을 존경(尊敬)함에 있어서, 항상 밝고 맑은 곱고 깨끗한 마음 가짐으로 대해야 한다."는 효(孝)의 참뜻을 기회(機會)있을 때마다 강조(强調)하는 철저(徹底)한 계몽가(啓蒙家)이기도 해서, 그에게는 "또순이"라는 별명(別名)외(外)에 "변호사"라는 또 하나의 별명(別名)까지 붙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