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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德男氏(손덕남씨)와 결혼(結婚)한 都錦蘭(도금란) 여사(女史)는, 그런대로 신혼(新婚) 1년간(年間)은 달콤한 꿈 속에서 나름대로의 행복(幸福)을 누릴 수가 있었다.
비록 농사(農事)가 가정(家庭)의 생활수단(生活手段)이긴 했지만 해마다 울려 퍼지는 풍년가(豊年歌)의 환희(歡喜)속에서 갓 시집온 도여사(都女史)도 삶의 의미(意味)가 되새겨지는 듯 마음이 흡족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청천병력(靑天霹靂)같은 일이 도여사(都女史)앞에 떨어졌으니, 그것이 곧 남편(男便)에 닥친 뜻하지 않은 병마(病魔)였다.
그것도 청신분열증(精神分裂症)이라는 듣기만 해도 불길(不吉)하고 기분(氣分) 나쁜 병(病)이었으니, 결혼생활(結婚生活) 1년(年)만에 겪는 그의 충격(衝擊)인들 오죽했으랴.
남편(男便)은 그와 같은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이 생기면서부터,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은 정도로 농사(農事)일에는 얼씬도 안 하면서 마치 식물인간(植物人間)처럼 먼 산(山)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보 형(型)이 되고 말았다.
이에 당황(唐惶)하고 실의(失意)에 빠질 뻔한 도여사(都女史)는, 자신(自身)마저 정신(精神)을 잃어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 후(後), 그 날부터 남편(男便) 대신(代身) 농사(農事)일에 전심(專心)하는 한편, 병환(病患)으로 누워 계시는 시모(媤母)님과 칠순(七旬)을 넘어선 시부(媤父)님 봉양(奉養)에 심력(心力)을 다 바쳐 효성(孝誠)을 발휘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극진(極盡)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남편(男便)의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은 더욱 극심하여져만 갔고 필경에는 요양원(療養院)으로까지 가게 되었다. 따라서 도여사(都女史)는 농사(農事)일 틈틈이 요양원(療養院)을 찾아가서 남편(男便)을 면회(面會)한 후(後) 그에게 용기(勇氣)를 북돋워 줬는가 하면, 다시 바쁘게 귀가(歸家)한 후에는 병상(病床)에 계시는 시모(媤母)님 병(病)구완을 위해 정성(精誠)을 다 바쳐 왔다.
끝내 며느리의 피 눈물나는 따뜻한 병(病)구완의 보람도 없이 시모(媤母)님은 타계(他界)하시고야 말았다.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시자 홀로 계신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는 그의 정신(精神)은 더욱 뜨거워져 갔다.
어느 새 그에게도 세 자녀(子女)가 생겼지만, 그들은 제쳐놓고 모든 신경(神經)을 시부(媤父)님 받들어 모시는 데에만 최선(最善)을 다해 왔다.
도여사(都女史)의 결혼(結婚) 당시(當時)만 해도 땔깜을 구(求)하기 위해 이 산(山) 저 산(山)을 헤매던 시절(時節)이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산(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실족(失足)을 해서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70 고령(高齡)의 시부(媤父)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상(病床)에 눕기가 일쑤여서, 집안은 그야말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격(格)이 되었지만, 이것이 바로 자신(自身)이 걸어가야 할 운명(運命)으로 여기면서, 말없이 묵묵히 가정(家庭)을 화목(和睦)하게 꾸려 나갔다.
그의 이와 같이 말없는 실천력(實踐力)이 오죽 강(强)했으면 마을 아낙네들로부터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는 별명(別名)까지 붙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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