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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자(李桃子) 여사(女史)는 평소(平素)에 이웃 주민(住民)의 신망(信望)이 높았을 뿐 아니라 특(特)히 중풍환자(中風患者)로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시모(媤母)님의 시봉(侍奉)에 있는 정성(精誠)을 다 바쳐 온 갸륵한 효부(孝婦)이다.
가정형편(家庭形便)도 말이 아니었는데 남편(男便)이 벌어다 주는 10만(万)원 내외(內外)의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쥐꼬리만한 그 월급(月給)으로 4명(名)의 자녀(子女)를 양육(養育)하며 일곱 식구(食口)의 생계(生計)를 꾸려가는 일도 벅찬 일이었지만 와병중(臥病中)인 시모(媤母)님을 어떻게 하면 보다 평안(平安)하게 모실까 하는 일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이여사(李女史)는 마음을 모질게 먹기로 스스로 다짐한 후, 남편(男便)과 자녀(子女)들보다는 환자(患者)인 시모(媤母)님을 위해 더욱 정성(精誠)을 쏟기로 결심(決心)하고 간병(看病)에 성력(誠力)을 다해 왔다.
찢어지는 가난으로 온 식구(食口)가 점심(點心)한 끼 굶는 일이 예사(例事)로 생각해도, 시모(媤母)님께만은 하루 세 끼 단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 끼 식사(食事)외에도 간식(間食)을 자녀(子女)들이 먹지 못하도록 하는 어머니로서는 모질 만큼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여사(李女史)는 가슴이 메어 남몰래 눈물 짓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매일(每日)같이 반복(反復)되는 대소변(大小便)의 처리(處理)라든가, 중풍환자(中風患者)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저런 궂은 일이 날마다 되풀이 됐지만 그는 조금도 귀찮아하거나 짜증내는 일 없이 뒷바라지를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해 왔으며 1주일(週日)에 한 번씩은 꼭 시모(媤母)님을 등에 업고 가까운 목욕탕(沐浴湯)까지 모시고 가서 깨끗하게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 알뜰한 정성(精誠)도 바쳤다.
더욱이 시내(市內)에서 진귀(珍貴)한 행사(行事)라도 벌어지면 택시로 현장(現場)까지 모시고 가서 재미있게 구경시켜 무경(無卿)함을 달래 드린 일도 잦았다고 한다.
중풍(中風)에 좋다는 신약(新藥)과 한약(漢藥)은 두루 구(求)해 왔으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방(房) 안에서 무리(無理)하지 않을 정도의 물리운물(物理運物)도 시켜 드리는 등, 시모(媤母)님을 다시 일으키려는 이여사(李女史)의 집념(執念)은 정말 눈물겨운 지경(地境)이었다.
그의 정성(精誠)이 오죽했으면, 부군(夫君)이 고맙다 못하여 등에 업어 주기까지 했으랴.
이여사(李女史)의 이렇듯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마침내 마을에서 알게 되었다.
어느 달의 반상회(班常會)에서 그날을 ‘李女史의 날’로 정(定)하고 반원(班員)들이 격찬(激讚)의 박수(拍手)를 보냈으며, 맛있는 다과(茶菓)까지 마련해서 그의 숭고(崇高)한 효성(孝誠)을 온 반원(班員)의 이름으로 칭송(稱頌)해 주었다고 한다.
이여사(李女史)는 비단 시모(媤母)님뿐만 아니라, 남편(男便)에게는 어진 아내로, 자녀(子女)들에게는 인자(仁慈)한 어머니로서 성력(誠力)을 다하고 있으며 '항상(恒常)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한번 입을 열라’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을 가훈(家訓)처럼 여기고 자녀(子女)들에게 깊이 심어 주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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