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하순남(河順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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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월성군 산내면
효부(孝婦) 하순남(河順南) 33세

오늘날 서구의 물질문명과 핵가족 풍조의 팽배로, 우리 고유의 정신생활 양식은 날로 변화일로에 있고, 따라서 경로효친 사상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돼 가고 있다. 

자기를 낳아 길러 주신 노부모를 그 자식이 봉양치 않을 때, 비록 국가에서 훌륭한 노인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응분의 대책이 있다 하더라도, 자녀가 효성으로 직접 시봉하는 것보다 못할 것임은 자명하리라 본다. 

하순남 여사의 숨은 행적을 살펴본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행로는 불행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 앞 못 보는 시모님을 극진히 모셨을 뿐 아니라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시모의 개안수술을 성공시켜, 광명한 천지를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하여사는 1944년 경산군 용성면 도덕동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겨우 국민학교를 마친 뒤, 23세 때 유팔방씨와 결혼하였다. 

어릴 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하였던 바, 무슨 기구한 운명의 소치인지 출가해 보니 시댁 또한 아주 가난한 농가였다. 가산이라고는 하천부지 300평과 초가삼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철부지 시동생 3형제와 앞 못 보는 시어머니가 계실 따름이었다. 

그러나 비록 가난은 하지만, 시모님과 남편 그리고 시동생의 인품이 순후하여 남부럽지 않은 단란한 가정이었음이, 그러나 비록 가난은 하지만, 시모님과 남편 그리고 시동생의 인품이 순후하여 남부럽지 않은 단란한 가정이었음이, 하여사에게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무한한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간혹 저녁상을 물린 뒤 가족끼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눌 때, 시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 듣는 바에 의하면 도시에 있는 시설이 좋은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하던데...” 하시며 자탄하실 때, 남의 자식된 도리로 하여사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고, 치료비라는 돈이 원수라서 모든 것이 뜻과 같게 안 되니 그 심정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가난에 허덕이는 현실의 가정형편으로는 한갓 헛된 망상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남의 자부(子婦)된 입장에서, 오로지 일편단심 시어머님의 눈을 뜨게 하고자 궁리를 거듭했으나 별다른 묘책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가난한 현실을 원망할 수만은 없었으므로, 이러한 딱한 형편을 극복하는 데는 비장한 결심으로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여사 스스로 다짐하게 되었다. 우선 거액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생활전선에 투신하기로 각오하였다. 

1973년 7월 남편과 의논 끝에 친정인 경산군내의 모(某)과수원으로 품팔이를 떠났으나, 앞 못 보는 시어머님과 가사의 모든 일이 걱정이 되어 도저히 지체할 수가 없고, 품삯으로 거액의 수술비를 모으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오래지 않아 귀가하였던 것이다. 그 후 남편과 다시 의논하여, 부군은 집의 살림살이와 눈 먼 시모를 보살피기로 하고, 자신은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겠노라고 제의하였으나, 가족들과의 합의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날이 연로해지는 시모의 개안수술을 자꾸 지연시키거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 가서 시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현대의학의 기술로써 밝은 천지를 구경하시게 해야겠다는 하여사의 일념은 더욱 굳어져 갔다. 

오매불망으로 생각하던 나머지 어쩔 수 없어서, 1974년 4월 어느 날에, 행선지를 밝히지 아니하고, 몇 해 후에 성공하여 돌아오겠다는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서, 가족들 몰래 대구로 가서 식모살이를 시작하였다. 

처음은 1~2만원의 월급을 받았으나, 의식주만 해결되는 직업이 식모생활의 특징이므로, 연 월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하였으며, 간간이 그 돈으로 계를 넣는 등 착실히 이자를 불리어 나갔다. 

그렇게 하여 모은 끝에, 1976년 9월 에는 100여만원이란 큰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이는 가난한 시골 농촌의 주부로서는 평생에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고, 이로써 시어머님의 평생의 소원인 개안수술의 비용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2년 반의 고된 식모생활을 청산하고, 부푼 희망을 안고 귀가하여, 시모님의 눈 수술을 가족들과 의논하였다. 그런데 워낙 가난에 시달렸던 나머지 시모님과 부군은, 차라리 그 돈으로 전답을 마련하여 배불리 먹고 살자고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굴할 하여사는 아니고, 돈은 다시 모을 수 있는 것이니, 시어머님의 눈을 뜨시게 하는 일이 나의 소원이요, 시급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만고효녀 심청에 버금하는 출천의 효성이기에 시모님과 부군, 그리고 시동생들도 마침내 찬성하였다. 

1977년 2월, 대구시 중구 소재의 김안과 의원에서, 그야말로 일구월심 숙원이던 시모님의 백내장수술을 시작하였다. 20일간의 치료로 눈에 가렸던 붕대를 푸는 순간, 20년간의 긴 세월 동안 앞을 못보고 살아 온 시모의 첫마디 “앗! 앞이 보인다. 천지가 환하다”고 감탄 하시며, 며느리인 하여사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셨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담당의사와 간호원 등의 의료진의 환호는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과 가족들도 다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며느리의 억척스럽고도 지극한 정성으로 시모 김 노파가 잃었던 시력을 되찾아, 20년 만에 광명한 천지에서 아들의 얼굴을 보더니, 어릴 때보다 모습이 많이 변했다 하시며, 또 평소에 재롱을 부리던 손녀(10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었는데, 막상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세상사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는 감격에 넘친 말씀이었다. 

끈질긴 집념과 지극한 효성으로, 시모님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한 그야말로 장한 며느리 하여사의 효심에 감격하였던 이 부락(마을) 230세대의 온 주민들은, 마을의 경사라 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하여사의 출천(出天)의 효행을 격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서 1978년 1월 대구문화방송 주최로 대구시민회관에서 시상한 제3회 금오대상(효행부문)을 받은 바도 있다. 

하여사의 이 같은 착한 행적은, 서양문물이 범람하여 효친사상이 흐려져 가는 현시대에 만인이 본받을 효의 전형이요, 효부의 산 교본으로서 높이 평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