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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봉사(奉仕)로 한 평생(平生)을 마치고 싶다는 황분주(黃分珠) 여사(女史)는, 지금껏 경상도지사(慶尙道知事)의 감사패(感謝牌)와 고령군수(高靈郡守)의 표창장(表彰狀), 경북약사사장(慶北藥事會長)의 표창장(表彰狀), 고령경찰서장(高靈警察署長)의 감사장(感謝狀)등 각계(各界) 각층(各層)으로부터 수많은 감사장(感謝狀)과 표창장(表彰狀)을 한 몸에 받아 온 숨은 선행자(善行者)로서, 그가 꽃피운 사랑의 발자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74년(年)부터 매년(每年) 거액(巨額)을 역자(役資)하여 관광(觀光)버스 한 대에 노인(老人)들을 모시고 효도관광(孝道觀光)의 즐거움을 지금까지 5회(回)에 걸쳐 마련해 주었고, 또한 어린 새싹들에게 충효사상(忠孝思想)을 심어 주는 뜻에서, 고령국민학교(高靈國民學校) 졸업생(卒業生) 3명(名)에게 금(金) 한 돈씩을 주는 효행상제도(孝行賞制度)를 만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령(高靈)어머니 장학회(奬學會)를 손수 조직(組織)한 후, 우수(優數)한 고등학교(高等學校) 학생(學生)과 가정형편(家庭形便)이 어려운 학생(學生) 1명(名)에게는 3년간(年間) 학비전액(學費全額)을 지급(支給)해 주기도 했으며, 또한 불우(不遇)한 노인(老人)들을 자택(自宅)으로 가끔 초대(招待)하여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고, 즐거운 경로(敬老)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특히 황여사(黃女史)는 군부인회장(郡婦人會長) 및 새마을 부부지도자(夫婦指導者)로서 자연보호(自然保護)를 비롯한 저축(貯蓄), 절미(節米), 가족계획사업(家族計劃事業), 그리고 새마음갖기 운동(運動) 등 남다른 애향심(愛鄕心)으로 내 고장 발전(發展)에 이바지해 왔다.
바로 그 좋은 실례(實例)로서, 자비(自費)를 투자(投資)하여 노인복지회관(老人福祉會館)을 건립(建立)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 회관(會館)이야말로 고령(高靈)에 거주(居住)하는 노인(老人)이면 누구나 마음대로 활용(活用)할 수 있는 희망(希望)과 행운(幸運)의 전당(殿堂)으로서, 여가선용(餘暇善用)을 위한 공예품(工藝品)등을 만들면서 여생(餘生)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향(故鄕)도 아닌 타향(他鄕)에서, 그것도 남성(男性)도 아닌 여성(女性)의 힘으로 고령(高靈) 땅에다 복지회관(福祉會館)을 건립(建立)한 황여사(黃女史)는, 어릴 때부터 남성우위(男性優位) 여성학대(女性虐待)의 이모저모를 너무나 많이 눈여겨 보아 온 탓으로, 남달리 여성운동(女性運動)에 많은 관심(關心)을 쏟고 있었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程度)로 열심(熱心)히 뛰고 있는 그에게, 어떤 저의(底意)가 있어서 사재(私財)를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오해(誤解)의 불씨가 날아오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눈총을 받을 때마다 황여사(黃女史)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희생(犧牲)과 봉사(奉仕)라는 단어(單語)"뿐 이라는 말로 오해(誤解)의 불씨를 보기 좋게 꺼 버린다고 한다.
노인(老人)들은 공경(恭敬)하는 그의 갸륵한 마음씨는 평소(平素)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병(病)들고 불우(不遇)한 노인(老人)들을 찾아가서 남몰래 쌀과 연탄(煉炭)을 사 준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만, 때로는 손수 약방(藥房)이나 병원(病院)으로 모시고 가서 건강(健康)을 같이 염려(念慮)해 주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自身)이 남보다 좀 여유(餘裕)가 있다고 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일 없이 종이 한 장, 쌀 한 톨이라도 아끼고 쪼개어 쓰는 검소(儉素)한 생활(生活)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計劃)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시종일관(始終一貫)"사랑과 봉사(奉仕)" 그것 하나뿐이라고 말할 정도(程度)로, 그는 자신(自身)보다 남을 위해서 태어난 인생(人生)처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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