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이분(李二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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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옥포면
열부(烈婦) 이이분(李二分) 70세

이이분(李二分) 여사(女史)는 텔레비전 사극(史劇)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나이로 시집을 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不過) 열 다섯이었으니, 시대적(時代的) 감각(感覺)이 다른 현대인(現代人)들은 상상(想像)도 못할 일이 아니었을까? 

동심(童心)에 젖어 한창 흥겹게 신나게 뛰어야 할 나이에 결혼(結婚)을 한 이여사(李女史)는, 시집오자마자 모진 가난과도 싸워야 할 만큼 남편(男便)은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대로 신혼(新婚)의 보금자리를 꾸며가며 단락(團樂)하게 살아갔다. 

맨주먹으로 출발(出發)한 이들 부부(夫婦)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끼꼬기와 가마니짜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논 400坪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열심(熱心)히 땀 흘려 일하였다. 

그런데, 남편(男便)이 1945년(年) 10월(月)에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면서부터, 암운(暗雲)이 덮기 시작했고 생계(生計)에도 많은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이미 여(女)에게는 3남매(男妹)를 두게 되어 앞으로 살길이 더욱 막막(漠漠)했지만, 그는 이에 조금도 굴(屈)하지 않고 이런저런 품삯 일을 찾아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특(特)히 중풍(中風)에 좋다는 약초(藥草)캐기 위해 하루도 수십리(數十里)길의 산골짝을 헤매기도 했는데, 그가 지금껏 캐온 약초(藥草)만 열 가마니는 될 것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더우기 30여년 전(余年前)인 그 당시(當時)만 해도 쫓기는 가난 때문에, 돈을 지불(支拂)하고 의료혜택(醫療惠澤)을 받는 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기에, "약초(藥草)만이 내 남편(男便)을 소생(蘇生)시켜 줄 것이다."라는 그의 약초(藥草)캐기 집념(執念)은 끈덕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에도 불구(不拘)하고 11년 전(年前)부터는 하반신(下半身)이 꼼짝달싹도 못 할 정도(程度)로, 완전(完全)히 마비(痲痺)가 되어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만 했다. 

따라서 이여사(李女史)의 간병(看病)은 남편(男便)이 몸져 눕기 시작하면서부터 장장(長長) 34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이 흘렀다. 

그 기나 긴 세월(歲月)을, 아무리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남편(男便)이라고는 하지만, 오로지 일편단심(一片丹心)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에만 전생애(全生涯)를 바쳐 온 그의 초인적(超人的)인 부부애(夫婦愛)는 천생배필(天生配匹)이라고 밖에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대소변(大小便)뿐만 아니라, 조석(朝夕)으로 밥도 한 술 두 술씩 떠서 입에 넣어 주었고, 남편(男便)이 좋아하는 음식물(飮食物)도 때때로 마련해서 차려 주었다. 

지금은 80 고령(高齡)을 바라보는 남편(男便)이 눈과 귀까지 어두워져, 이여사(李女史)는 일체의 외출(外出)까지 삼가고 있는데, 그 자신(自身) 고희(古稀)의 노령(老齡)인데도 불구(不拘)하고 마치 한 쌍(雙)의 원앙새처럼 밤이나 낮이나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에만 전념(專念)하고 있다. 

남편(男便)을 대신(代身)하여 한 가정(家庭)의 가장(家長) 노릇을 하면서, 한 평생(平生)을 남편(男便)에 대한 정열(情熱)과 간병(看病)에만 몸바쳐 온 이여사(李女史)야말로, 현대(現代)에서는 보기 드문 열녀(烈女)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