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손숙신(孫淑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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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울진군 기성면
효부(孝婦) 손숙신(孫淑辰) 33세

효부(孝婦)이자 열인(烈人)인 모범여성(模範女性)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손숙진(孫淑辰) 여사(女史)이다. 

25세(歲)에 출가(出嫁)한 그는, 비록 넉넉한 살림은 못됐지만 그런 대로 아기자기하게 행복(幸福)을 설계(設計)하면서 살아갔는데, 뜻하지 않게 남편(男便)이 병(病)들어 누우면서부터 그의 가정(家庭)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피를 토(吐)하면서 쓰러진 남편(男便)의 병명(病名)은 폐결핵(肺結核)이었던 것이다. 

노령(老齡)에 접어든 시모(媤母)님과 딸 하나 그리고, 임신중(姙娠中)인 자신(自身)을 포함한 모든 식구(食口) 생계(生計)가 뜻하지 않은 남편(男便)의 병(病)으로 막연(漠然)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우선 발등의 불을 꺼야 할 일이 남편(男便)의 약(藥)값이었다.

손여사(孫女史)가 생각해 낸 것은 품팔이 노동(勞動)뿐이었는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갖 잡노동(雜勞動)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동(勞動)을 하면서 가정(家庭)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形便)이었다. 

온갖 약(藥)으로 남편(男便)의 병(病)을 고치려고 백방(百方)으로 노력(努力)해 보았지만 차도(差度)가 없었다. 

독실(篤實)한 기독교 신자(基督敎 信者)이기도 한 그는, 한편으로 약(藥)을 쓰면서 매일(每日)같이 교회(敎會)에 나가서 정성(精誠)들여 새벽 기도(祈禱)를 하기를 9년(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 때나 그의 간절한 새벽 기도(祈禱)는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계속(繼續)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일까. 시모(媤母)님께서 1977년(年) 봄부터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으시다더니 실명(失明)해 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여가장(女家長) 노릇을 하면서 남편(男便)과 시모(媤母)님을 번갈아 간병(看病)해야만 하는 그는, 너무나 뜻하지 않은 일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막노동(勞動)에서 행상(行商)으로 바꾸어 버린 손여사(孫女史)는, 새벽에 재빨리 일어나 행상(行商)을 마치고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50여리(余里)가 넘는 두메산골을 헤매면서 한나절을 보낸 후, 급히 집에 돌아와서는 정성(精誠)들여 간호(看護)를 하는 등, 숨 한번 크게 마음놓고 쉴 날이 없을 만큼 그의 일과(日課)는 바쁘기만 하였다. 

이와 같은 손여사(孫女史)의 지성(至誠)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그 후(後) 남편(男便)은 결핵요양원(結核療養院)을 거쳐 건강(健康)을 되찾아 가정(家庭)으로 돌아오게 했고, 시모(媤母)님의 시력(視力)도 그야말로 기적적(奇蹟的)으로 회복(恢復)이 되는 등, 손여사(孫女史) 가정(家庭)에는 다시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더욱 감탄(感歎)해 마지않는 것은, 남편(男便)과 시모(媤母)님께서 와병중(臥病中)일 때도 손여사(孫女史)는 자신(自身)보다 불우(不遇)한 사람을 네 차례나 도와 줄 정도(程度)로 기독교(基督敎)믿음, 사랑, 소망의 참다운 실천자(實踐者)였으며, 특히 새마을 운동(運動)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오를 무렵, 그는 누구보다 솔선(率先)하여 지붕 개량(改良)을 했는가 하면, 각종 부여사업(婦女事業)에도 자진(自進)해서 구슬땀을 흘리는 등 모범(模範)을 보였다. 

"女權伸張(여권신장)의 열쇠는 누가 쥐어 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女性) 자신(自身)이 쥐고 있다,"고 말하는 손여사(孫女史) 시간(時間) 틈틈이 인근(隣近) 부녀자(婦女子)들을 모아놓고 여권(女權)을 강조(强調)하는 숨은 여성지도자(女性指導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