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박분이(朴粉伊)

페이지 정보

본문

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군 화북면
효부(孝婦) 박분이(朴粉伊) 63세

3남매(男妹)의 장녀(長女)로 태어난 박분이(朴粉伊) 여사(女史)는, 어릴 때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後) 부모(父母)없는 설움 속에서 자라 오다가 20세(歲) 되던 해에, 동생들을 친척(親戚)집에 맡기고 가난한 농가(農家)로 시집을 갔다.

시부(媤父)님을 모시고 그런 대로 생활(生活)을 해 오던 중, 남편(男便)이 지병(持病)인 폐렴(肺炎)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그는 폐렴(肺炎)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대구(大邱), 서울, 부산(釜山) 등 대도시(大都市)의 의원(醫院)과 병원(病院)은 물론, 수십리(數十里)길 산골짝까지 찾아가서 명약(名藥)을 구(求)해다 남편(男便)에게 복용(服用)시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시부(媤父)님을 봉양(奉養)을 위해 그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성(至誠)껏 받들어 모셨으며, 시부(媤父)님 건강(健康)에도 좋다는 약초(藥草)를 수시(隨時)로 캐어서 손수 달려 드리는 등, 남편(男便)과 시부(媤父)님을 위한 뜨거운 정성(精誠)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을 감동(感動)시켰다. 

어느 하루는 역시 남편(男便)의 약(藥)을 구(求)해서 집에 돌아오다가 과로(過勞)에 못 이겨, 바로 마을 입구(入口)에서 쓰러진 일이 있을 만큼 남편(男便)을 구(救)해 보고자 하는 그의 집념(執念)은 끈덕질 정도(程度)였다. 

끝내 남편(男便)은 건강(健康)을 회복(回復)하지 못하고 사망(死亡)했는데, 박여사(朴女史)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風習)그대로 3년상(年喪)을 치른 후(後) 소복(素服)으로 슬픈 나날을 보냈다. 

가장(家長)을 잃은 슬픔도 가실 사이 없이, 낮에는 들판에서 땀 흘려 일했고, 밤에는 부명과 삼베짜는 일로 괴로움을 달래면서 시부(媤父)님을 정성(精誠)들여 모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부(媤父)님이 병석(病席)에 눕게 되어,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는 물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옷을 갈아 입히고 목욕(沐浴)을 시키는 등 그의 마음을 다 바쳐 병(病)구완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서 김을 매고 집으로 발길을 옮기던 박여사(朴女史)는, 자신(自身)도 모르게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졸도(卒倒)했는데, 그것이 바로 뇌졸증(腦卒症)의 원인(原因)이 되었고, 바로 그 날부터 사지(四肢)를 못쓰는 중풍환자(中風患者)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世上)에 이와 같은 가혹(苛酷)한 운명(運命)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랴. 

중환자를(重患者)를 간호(看護)하다가 자신(自身)마저 중환자(重患者)가 되어 버린 박여사(朴女史)는, 지금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몸으로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절감(切感)하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자신(自身) 자유스럽지 못한 환자(患者)이면서도, 옷 방에 누워 있는 시부(媤父)님 병환(病患) 걱정으로 눈물짓는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하늘도 감탄(感歎)하고 땅도 감탄(感歎)할 만큼 아름다운 "효(孝)의 꽃" 그것이었다. 

지금도 자녀(子女)들의 간호(看護)를 받으며 병석(病席)에 누워있는 박여사(朴女史)는, 몸져 눕기 전(前)만 해도 부지런하기로 유명(有名)했는데, 남자(男子)도 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일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處理)해 버리는 바람에 "번갯불할머니"란 별명(別名)을 지니기도 했다. 

비록 그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인 무학(無學)이었지만, "조상(祖上)에게 감사(感謝)하는 마음을 외면(外面)하거나 기피(忌避)하는 사람은, 개나 돼지보다 못한 짐승이다." 라는 말을 주변(周邊) 사람들에게 곧잘 강조(强調)하는 설법자(說法者)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