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윤탁기(尹卓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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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청기면
효부(孝婦) 윤탁기(尹卓基) 52세

윤탁기(尹卓基) 여사(女史)는 18세(歲)의 젊은 나이로 이학이씨(李鶴伊氏)와 결혼(結婚)하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집온 지 사흘만에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는 불운(不運)을 겪어야만 했고, 또한 시모(媤母)님이 돌아가시기 전(前)부터 줄곧 병석(病席)에만 누워 계시는 시부(媤父)님을 돌보아야 하는 등, 신혼초기(新婚初期)부터 병(病)구완을 위해 이 세상(世上)에 태어난 듯한 여성(女性)이 바로 윤여사(尹女史)였다. 

시부(媤父)님의 병명(病名)은 반신불수(半身不隨)인 중풍(中風)으로서, 대소변(大小便) 뒷바라지를 비롯한 모든 간호(看護)와 시중은 윤여사(尹女史)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몹시 가난했던 탓으로 동네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한 외로움 속에서도, 겨울에는 따뜻한 물로 그리고 여름엔 시원한 냇가로 모시고 나가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여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워 온 두 딸이 이질(痢疾)로 몸저 눕게 됐고, 필경(畢竟)에는 약(藥)과 어머니의 극진(極盡)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아랑곳 없이 목숨을 잃고만 뼈아픈 슬픔을 맞게 됐다. 

윤여사(尹女史)는 청천벽력(靑天霹靂)만 같은 모진 운명(運命)앞에, 가슴을 찢는 통곡(痛哭)으로 항거(抗拒)해 보았으나, 그것도 순간(瞬間)일뿐, 다시 정신(精神)을 가다듬고 불우(不遇)한 운명(運命)과 싸우면서 시부(媤父)님 간병(看病)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남편(南便)에게 가혹(苛酷)한 채찍이 내려졌다. 

6.25 동란(動亂) 중(中) 남편(男便)이 이웃 마을에 식량(食糧)을 구(求)하러 갔다가 밤늦게 귀가(歸家)하던 중, 공비(共匪)의 총탄세례(銃彈洗禮)를 받게 됐는데, 그 중의 탄환(彈丸) 한 발이 남편(男便)에게 치명상(致命傷)을 입혔던 것이다. 

온 몸이 피투성이 가 된 채 집에 돌아온 남편(男便)은, 신체(身體)의 가장 중심부(中心部)인 배꼽 바로 밑을 움켜쥐고 울고 있지 않는가, 윤여사(尹女史)가 비로소 정신(精神)을 가다듬고 상처(傷處)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남편(男便)의 심볼인 성기(性器)를 관통(貫通)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 날부터 청춘(靑春)을 송두리째 빼앗긴 남편(男便)은 물론, 윤여사(尹女史) 자신(自身)도 성불구(性不具)인 남편(男便)과 일생(一生)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한다는 말 못할 고뇌(苦惱)가 순간 그의 뇌리(腦裡)를 스쳐갔지만, 자신(自身)이 남편(男便)을 돌보지 않으면 누가 그를 돌볼 것인가 하는 부부애(夫婦愛)로 더욱 남편(男便)을 알뜰히 섬겨 나갔다. 

윤여사(尹女史)는 전염병(傳染病)으로 두 딸을 잃은 슬픔에다, 자신(自身)에게 덮친 성불구(性不具)란 괴로움으로 낮이나 밤이나 술로 자학(自虐)할 정도의 비탄(悲嘆)속에서 헤매는 불쌍한 남편(男便)의 슬픔을 달래면서 살아갔다. 

그럴 때마다 윤여사(尹女史)는 남편(男便)에게 매달려 눈물로 호소(呼訴)하면서, 물에 빠져도 정신(精神)을 차려야 한다고 충고(忠告)도 했고, 때로는 남편(男便)이 좋아하는 음식(飮食)을 마련하여 용기(勇氣)를 복돋아 주기도 하였다. 

그 후(後) 이를 부부(夫婦)는 양자(養子)를 맞아들여 새로운 행복(幸福)의 문(門)을 열게 되었고, 비록 육체(肉體)의 성(性)은 불구(不具)가 되었지만, 새롭게 사랑으로 영근 마음의 성(性)으로 또 다른 행복(幸福)의 열쇠를 찾게 되었다. 

윤여사(尹女史)의 아름다운 가화(佳話)가 세상(世上)에 알려지자, 그에 대한 찬사(讚辭)의 소리도 높아졌고, 특히 1971년도(年度)에는 영양군수(英陽郡守)로부터 열녀표창(烈女表彰)까지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