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박말측(朴末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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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덕군 영덕면
효부(孝婦) 박말측(朴末側) 26세

박말칙(朴末側) 여사(女史)는 쥐꼬리 만한 월급(月給)으로 근근 생활(生活)을 이어가는 주류배달원(酒類配達員)의 아내로서, 그가 받들어 모셔야 할 웃어른만 해도, 시조모(媤祖母)님을 비롯하여 시부(媤父)님, 시숙(媤叔), 남편(男便) 등 4명(名)과 자녀(子女) 2명(名)을 합(合)한 6명(名) 가족(家族)이었다.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남편(男便)이 벌어다 준 월급(月給)을 이리저리 쪼개어, 그런 대로 남부럽지 않게 생활(生活)을 해 오던 중, 시부(媤父)님께서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었다. 

그날부터 젊은 박여사(朴女史)의 정성(精誠)스러운 간호(看護)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흔히 중풍환자(中風患者)들에게서 겪는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 밖에 방(房)안의 철저(徹底)한 위생관리(衛生管理)와 환자(患者)의 의복(衣服)이나 이불의 빨래 등 하나에서 열까지 지성(至誠)으로 병간호(病看護)에 힘썼다. 

이제 한창 꽃필 나이인 청춘(靑春)도 불사라 버리고, 시모(媤母)님도 아닌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처리(處理)하는 일이란, 말과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박여사(朴女史)는 단 한마디의 불만(不滿)을 토(吐)하거나 불평(不平)도 없이 진심(眞心)으로 정성(精誠)을 다해 받들어 모셨다. 

오죽했으면 그의 친구(親舊)들이 "너는 시아버지의 오줌똥을 받아내기 위해서 시집을 갔느냐?"고 말할 정도로, 박여사(朴女史)야말로 시부(媤父)님 봉양(奉養)을 위해 태어난 사람만 같다. 

그런데 불운(不運)은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이번에는 주류배달(酒類配達)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던 남편(男便)마저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當)해 왼쪽다리 골절(骨折)로 불구(不具)가 되어, 시부(媤父)님 곁에 나란히 누워야만 하는 몸이 되었다. 

따라서 박여사(朴女史)는 시부(媤父)님과 번갈면서 간병(看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한 남편(男便) 대신(代身) 생계(生計)를 위해 무엇인가 활동(活動)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處地)에 놓이게 되었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콩나물 장사였는데, 이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춘하추동(春夏秋冬)을 하루같이 콩나물행상(行商)으로 더욱 바쁜 몸이 되었다. 

따라서 행상(行商) 틈틈이 시부(媤父)님도 돌보랴 남편(男便)도 돌보랴, 그야말로 북치고 나팔 부는 격(格)으로 그의 하루 일과(日課)는 다사다망(多事多忙) 그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두 자녀(子女)를 알뜰히 키우는 그의 사랑 또한 대단했는데, 젊은 여성(女性)이 저토록 자기희생(自己犧牲)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웃어른을 봉양(奉養)하고 남편(男便)하고 남편(男便)을 받들며 자녀교육(子女敎育)에까지 소홀함이 없는 그를 가리켜, 이웃 사람들은 부처같은 사람이라고들 하였다. 

비록 그녀(女)는 국민학교(國民學校) 문턱밖에 넘지 못했지만, 최고학교부(最高學校部)를 졸업(卒業)한 학사주부(學士主婦) 못지않게 경로사상(敬老思想)도 두터웠고, 예의범절(禮儀凡節)도 남달리 바를 정도로 인간관(人間觀), 사회관(社會觀) 모두가 나무랄 곳 하나 없는 그야말로 현대(現代)에 보기 드문 마음씨 고운 아름다운 여성(女性)이었다.

자효쌍친락(子孝雙親樂)이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듯이, 자식(子息)이 효도(孝道)하면 양친(兩親)이 즐거워하고, 또한 집안이 화목(和睦)하면 만사(萬事)가 팽통(亨通)하는 법으로서, 비록 그녀(女)는 콩나물 행상(行商)을 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항상 평화(平和)의 꽃을 피우고 있는 행복(幸福)한 여인(女人)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