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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歲)의 어린 나이로 불구(不具)의 남편(男便) 이문규씨(李文圭氏)와 결혼(結婚)한 이소분(李小分) 여사(女史)는, 그날부터 32년(年)이란 긴 세월(歲月)동안 남편(男便)의 간병(看病)은 물론, 시조부모(媤祖父母) 그리고 시부모(媤父母)등 10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을 돌보는 여가장(女家長)으로서 거의 한 평생(平生)을 하루같이 몸바쳐 일해 온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그는 재취(再娶)의 운명(運命)을 안고 시집을 갔는데, 그 때 남편(男便)의 가산(家産)은 초가(草家) 3간(間)과 논 600평(坪)이 전부(全部)여서, 그것으로 10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이 살아나기엔 너무나 벅차기만 하였다.
4남(男) 1녀(女)의 맏며느리로서 시조부모(媤祖父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 등 층층시하(層層侍下)로 웃어른을 모셔야 하는 어려움도 뒤따랐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울린 일은 17세(歲) 때부터 불구(不具)의 몸으로 고생하는 남편(男便)의 딱한 처지(處地)였다.
시집오기가 바쁘게 전국(全國)을 대상(對象)으로 명약(名藥)을 찾고 약초(藥草)를 캐러 다니는 등 백방(百方)으로 노력(努力)해 보았지만, 남편(男便)의 병(病)은 제자리 걸음이어서 그의 마음은 더욱 애타기만 하였다.
어디 그뿐이었으랴, 하루는 시조부(媤祖父)님이 병석(病席)에 눕는가 하면, 다음 날은 시조모(媤祖母)님이 또 그 다음에는 역시 노령(老齡)으로 접어든 시부(媤父)님이, 또 그 다음 날은 시모(媤母)님 차례라 할 만큼 환자(患者)들의 행렬(行列)은 줄을 이었다.
특히 노환(老患)인 시조모(媤祖母)님의 경우는, 일체의 기동(起動)도 못하시는 탓으로 일일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만 하였다.
그뿐이면 또 괜찮았겠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둘째 동서(同壻)가 폐결핵(肺結核)으로 사망(死亡)하고, 시조부(媤祖父)님까지 타계(他界)하셨는가 하면, 둘째 시(媤)동생마저 남편(男便)의 병세(病勢)와 마찬가지로 기동(起動)이 불가능(不可能)해지는 등, 이여사(李女史)의 나이 35세(歲)때 불운(不遇)이 겹치고 덮쳤다.
하는 수 없이 이여사(李女史)가 시(媤)동생의 자식(子息) 5남매(男妹)까지 양육(養育)해야 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방(房)저 방(房)을 드나들며 웃어른들의 간호(看護)도 게으르지 않아야 했지만, 10여명(餘名)의 식사(食事)시중하며, 그 엄청난 빨래 등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쓰러질 뻔했다는 이여사(李女史)였지만, 심신(心身)이 괴로울 때마다 이여사(李女史)는 "일인(一忍)으로써 백용(百勇)을 지탱할 것이며, 일정(一靜)으로써 백동(百動)을 제압(制壓)할 것이다."라는 굳센 마음가짐으로 참고 이겨 나갔다.
남편(男便)이 불구(不具)였기에 모든 가사(家事)일을 이여사(李女史) 혼자서 밀고 나가야 했으므로 그의 심신(心身)은 단 하루도 평안(平安)한 날이 없었다.
그는 어릴 때 부모(父母)로부터 효자(孝子)가 부모(父母)를 섬기는 것은, 날마다 기거(起居)하시는 것을 공경(恭敬)스럽게 받들어 모시고, 봉양(奉養)할 때 그 마음을 즐겁게 받들며, 몸이 편찮으실 때는 지극(至極)히 걱정하여 드리며, 돌아가셨을 때는 그 슬픔을 다하여 받들며, 제사(祭祀)를 드릴 때에는 그 엄숙(嚴肅)함을 다하여 극진(極盡)히 받들어야 한다."라는 말을 항상(恒常)들어온 탓으로, 비록 대부대(大部隊)에 가까운 많은 식구(食口)들이었지만, 별다른 탈없이 가정(家庭)을 원만(圓滿)하게 이끌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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