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서옥연(徐玉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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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산동면
효부(孝婦) 서옥연(徐玉蓮) 59세

남편(男便)의 얼굴조차 기억(記憶)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혼생활(結婚生活) 불과 3개월(個月)만에, 신혼(新婚)의 단꿈이 깨어져버린 비운(悲運)의 여주인공(女主人公)이 바로 서옥연(徐玉蓮) 여사(女史)이다. 

서여사(徐女史)의 남편(男便)은 일제시(日帝時) 결혼(結婚) 3개월(個月)만에 일본(日本)에 건너갔고, 그 후(後) 얼굴조차 한 번 못보고 7년 후(年後)에 사망소식(死亡消食)을 접(接)했을 뿐이다. 

그가 떠맡은 짐은 고희(古稀)를 넘긴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 시(媤)누이 등 여덟 명의 대식구(大食口)에다, 전답(田畓)이라야 고작 4,5 과락(科落)이 전부(全部)였다.

그뿐이면 또 괜찮았겠는데, 시부모(媤父母)님 모두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을 떠날 수 없으니 그에게는 더욱 큰 희생(犧牲)과 봉사(奉事)가 요구(要求)됐다. 

주위(周圍)에서 간혹 "아까운 청춘(靑春)과 인생(人生)을 헛되이 보낼 것이 아니라, 눈 딱 감고 재가(再嫁)의 길을 찾아가라." 는 동정(同情) 어린 충고(忠告)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서여사(徐女史)는 "나는 이 집안의 귀신(鬼神)이 되기를 결심(決心)한 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충고(忠告)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어려운 환경(環境)에도 굴(屈)하지 않고 양(養)아들까지 맞아들인 서여사(徐女史)는, 손이 터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농사(農事)일에 전력(全力)하면서, 한편으로는 노환(老患)으로 신음(呻吟) 중(中)인 시부모(媤父母)님을 정성(精誠)을 다해 봉양(奉養)해 왔다. 

뿐만 아니라 불우(不遇)하게 3개월(個月)만에 생이별(生離別)하고, 그 후(後) 단 한 번의 얼굴도 보지 못한채 사망(死亡)한 남편(男便)의 제사(祭祀)도 해마다 꼭 행사(行祀)하는 정성(精誠)도 잊지 않았다. 비록 그는 남편(男便)없이 병(病)든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있지만, 지금껏 단 한 번의 말대꾸나 짜증을 내는 일 없이 순종(順從)해 왔다. 

무릇 "며느리는 시부모(媤父母)님의 그림자가 되고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여사(徐女史)가 지는 생활신조(生活信條)였을 만큼, 시부모(媤父母)에 대한 그의 공경심(恭敬心)은 지극(至極)하였다. 

부족(不 足)한 농토(農土)를 가꾸어 어려운 살림을 근근 이어가면서도, 시(媤)동생들과 양(養)아들을 고등학교(高等學校) 교육(敎育)까지 마칠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시(媤)동생 등 6명(名) 모두를 결혼(結婚)시켰고 마침내 1961년(年)에는 선산(善山) 경찰서장(警察署長)으로부터 장(壯)한 어머니 상(賞)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서여사(徐女史)는 누구보다도 새마을 정신(精神)이 투철(透徹)한 여성(女性)으로서, 새 마을 가꾸기가 있을 때마다 삽과 괭이를 들고 앞장서서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이 무엇인가를 손수 보여 주기도 하는 또순이이기도하다. 그리고, 불우(不遇)이웃돕기에도 앞장서서 팔순(八旬)이 넘은 불우(不遇)한 김수동 노인(老人)에게는, 모곡운동(募穀運動)을 통해 양곡(糧穀)을 모아 주는 등 남달리 인정(人情)이 많은 여성(女性)이기도 하다. 

평소(平素)에 그는 기회(機會)있을 때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형제우애(兄弟友愛)의 정신(精神)을 양(養)아들과 시(媤)동생들에게 깊이 심어준 교육(敎育)의 효과(效果)였을까. 이들은 한결같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양보(讓步)하는 마음으로 우애(友愛)깊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너의 원수(怨讐)를 사랑하고 너를 저주(詛呪)하는 사람을 위해 행복(幸福)하고, 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善)을 베풀라." 

바로 이 말이, 시(媤)동생들이 분가(分家)할 때마다 서여사(徐女史)가 잊지 않고 안겨 주는 마음의 선물(膳 物)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