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김금순(金今順)

페이지 정보

본문

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내서면
효부(孝婦) 김금순(金今順) 45세

김금순(金今順) 여사(女史)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효부(孝婦)라고 말하는가 하면, 현모(賢母)라 일컫기도 하고, 열부(烈夫)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만큼 김여사(金女史)는 세 가지 부덕(婦德)을 모두 겸비(兼備)한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가난한 농부(農夫)의 아내로 20세(歲)에 결혼(結婚)한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을 내조(內助)하며 그런 대로 살아오던 중, 27세(勢)의 남편(男便)이 갑자기 득병(得病)하는 바람에 행복(幸福)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고희(古稀)을 넘기신 시모(媤母)님과 세 자녀(子女)를 교육(敎育)해야 할 책임(責任)이 그의 두 어깨에 매이게 되자, 눈앞이 캄캄해지기만 했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막벌이 노동(勞動) 현장(現場)으로 뛰어들었다. 

남편(男便)은 끝내 아내의 따뜻한 구완의 보람도 없이 하체마비(下體痲痺)로 앉은뱅이가 되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마저도 수족(手足)을 못 쓰는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불구(不具)가 되어, 김여사(金女史)의 마음을 더욱 괴롭혔지만, 그는 온화(溫和)한 성격(性格)과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을 잘 조화시켜, 두 분을 지성(至誠)으로 보살펴 드렸다. 

어쩌다 품팔이 노동(勞動)을 하다 늦게 귀가(歸家)할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시모(媤母)님은 시모(媤母)님대로, 또한 남편(男便)대로, 아무렇게나 대소변(大小便)을 보아 온 집안을 어질러 놓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지만, 김여사(金女史)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微笑)를 띠우면서 모든 것은 자신(自身)이 늦게 귀가(歸家)한 탓이라고 말하면서, 도리어 용서(容恕)를 빌 만큼 자애(慈愛)로운 여성(女性)이 바로 김여사(金女史)였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닌 24년여(年餘)의 긴 세월(歲月)동안을 뒷바라지해 왔으니 놀랄 수밖에 더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할 정도(程度)로 깨끗하게 목욕(沐浴)을 시켜 드렸는가 하면, 자신(自身)과 자녀(子女)들은 매일(每日)같이 국수와 라면으로 끼니를 메워도,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에게만은 따뜻한 밥상을 마련하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해 두 환자(患者)를 섭섭지 않게 모셔 왔다. 

김여사(金女史)는 10여년(餘年) 동안 근검절약(勤儉節約)하여 저축(貯蓄)한 돈과 산골 논 600평(坪)을 처분(處分)하여,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한 곳에 3간(間) 가옥(家屋)을 마련하는 한편, 황무지(荒蕪地) 1,500평(坪)을 사들여 남성(男性)들도 하기 힘든 자갈밭을 개간(開墾)하여, 마침내 년간(年間) 벼 50여(餘) 가마의 수확(收穫)을 볼 수 있는 훌륭한 옥토(沃土)로 바꿔 놓았다. 

개간사업(開墾事業)을 할 때 그는 1km가 넘는 곳에서 리어카로 객토(客土)를 하는 등 2년여(年餘)에 걸친 그의 피나는 노력(努力)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創造)해 낸 것이다. 

남자(男子)도 아닌 여성(女性)의 힘으로 온 몸이 찌그러지는 듯한 고통(苦痛)과 싸워가면서 그는 개간사업(開刊事業)을 해냈다. 

"흙처럼 정직(正直)한 것은 없다. 낡고 병(病)든 토양(土壤)에서는 모든 작물(作物)이 잘 결실(結實)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농민(農民), 일하지 않는 농민(農民)에게는 행운(幸運)이 찾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교훈(敎訓)을 피나는 개간사업(開墾事業)을 통해서 얻었다고 말한다. 

김여사(金女史)는 오늘도 자신(自身)의 힘으로 개간(開墾)한 논밭에 뛰어들어가 일하면서, 한편으로 시모(媤母)님을 평안(平安)하게 모시고 남편(男便)을 지성(至誠)껏 받들며, 자녀교육(子女敎育)을 위해서도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으니 얼마나 장(壯)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