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은희(鄭銀姬)

페이지 정보

본문

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문경군 점촌읍
효부(孝婦) 정은희(鄭銀姬) 35세

여고(女高)를 졸업(卒業)한 정은희(鄭銀嬉) 여사(女史)는, 결혼(結婚)하자마자 중풍(中風)으로 누워 계신 시부(媤父)님의 병간호(病看護)를 떠맡아야만 하였다. 

자부(子婦)의 몸으로 신체(身體)가 부자유(不自由)스러운 그것은 시모(媤母)님도 아닌 시부(媤父)님을 보살펴 드린다는 것이 몹시도 거북스러우면서 괴로웠지만, 정여사(鄭女史)는 조금도 싫은 잧색을 짓지 않고 하루 대여섯 차례에 걸친 용변처리(用便處理)와 옷 갈아 입히기 등 온갖 궃은 일을, 단 한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해 왔다. 

뿐만 아니라 하루 세 차례에 걸친 식사(食事) 외(外)에도. 3회(回)의 간식(間食)으로 경영관리(經營管理)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였다. 

특(特)히 불결(不潔)해진 침구류(寢具類)는 수시로 깨끗하게 세탁(洗濯)을 해서 갈아 드리는가 하면, 매일(每日)같이 햇볕에 말려서 기분(氣分)좋게 주무실 수 있도록 위생(衛生)에도 빈틈없이 신경(神經)을 썼다. 

슬하(膝下)에 2남(男) 2녀(女)를 두고, 운수업(運輸業)을 하는 남편(男便)의 뒷바라지도 성심성의(誠心誠意)껏 하면서 시부(媤父)님을 알뜰히 봉양(奉養)해 오기를 12년(年). 

12년(年)을 하루같이 언제나 웃음 뛴 얼굴로 봉양(奉養)해 온 정여사(鄭女史)는, 점촌(店村)이 낳은 자랑스러운 효부(孝婦)라고 할 정도(程度)로 그의 효심(孝心) 은 누가 보아도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질 만큼 숭고(崇高)하였다. 

시부(媤父)님 간호(看護)에 눈코 뜰 사이가 없으면서도 매일(每日)같이 밤 늦게 귀가(歸家)하는 남편(男便)을 위해서도 상냥한 부덕(婦德)으로 위로(慰勞)해 주는가 하면, 자녀(子女)들에게 대(對)해서도 인자(仁慈)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베풀어 주었다. 

남편(男便)이 운수업(運輸業)을 하는 탓으로 남달리 심신(心身)의 피로(疲勞)를 많이 느꼈지만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인(因)하여, 간혹 신경(神經)이 날카로워질 때가 있어도 봄눈 녹듯이 모든 일이 웃음으로 끝난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면 한밤중에 서로가 몰래 살며시 일어나. 연탄(煉炭)불을 발아 넣을 정도로 남편(男便)은 아내를 아끼고 아내는 남편(男便)을 위하는 마음이, 누가 보나 다정(多情)한 한 쌍의 원앙새만 같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을 공통(共通)된 이야기였다. 

정여사(鄭女史)는 남편(男便)과 함께 관광(觀光)길에 나설 수 있는 기회(機會)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男便)한테서 자기(自己) 몫에 해당(該當)하는 여행비용(旅行費用)을 돌려 받아서, 그 돈으로 시부(媤父)님이 좋아하는 음식(飮食)을 마련해 드리는 알뜰한 효성(孝誠)을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시부(媤父)님께서 또 다른 병(病)이 겹쳐 병고(病苦)에 시달림을 받을 때는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세어 가면서 곁에서 간호(看護)를 해 드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풍(中風)에 좋다는 명약(名藥)이란 명약(名藥)은 백방(百方)으로 수소문해서 구(求)해다 드리기도 했지만 더 이상(以上)의 건강회복(健康回復)은 불가(不可)하였다. 

다만 병세(病勢)가 더 악화(惡化)되지 않도록 부단(不斷)한 노력(努力)이 있을 뿐이다. 

비록 그는 12년간(年間)을 병간호(病看護)로 시달림을 받아 왔지만, "미소(微笑)는 곧 행복(幸福)을 꾸려 주는 어머니다'라는 그의 생활신조(生活信條) 그대로, '모나리자'만 같은 정여사(鄭女史)의 미소(微笑)는 모든 여성(女性)들이 본받아야 할 값진 미소(微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