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우치숙(禹致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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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군위군 의흥면
효부(孝婦) 우치숙(禹致淑) 58세

6남매(男妹) 중(中) 장녀(長女)로 태어난 우치숙(禹致淑) 여사(女史)는, 남(男)동생이 소아마비(小兒麻痺)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화병으로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하던 열 일골 살 나던 해에 결혼(結婚)을 했는데, 조기결혼(早期結婚)의 동기(動機)는 친정(親庭) 식구(食口) 식량(食糧)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출가(出稼)를 한 것이 그 이유(理由)였다. 

찢어지는 친정(親庭)의 가난은 시가(媤家)에서도 이어졌는데, 신혼초(新婚初)부터 나물죽으로 연명(延命)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男便)이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가정(家庭)의 생계(生計)를 돕기 위해서 그 역시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가난은 고생(苦生)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교통사고(交通事故)로 불구(不具)가 된 친정(親庭)어머니와 불구(不具)인 남(男)동생까지도, 자신(自身)이 시가(媤家)에서 모시지 않으면 안될 딱한 현실(現實)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더라고 말하는 우여사(禹女史)는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은 여(女)동생이 결혼(結婚)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不得已) 그녀(女)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는데, 그 후(後) 20년(年)째 되던 해인 1971년(年)에는 그의 어머니가 중풍(中風)까지 겹치게 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친정(親庭)어머니와 소아마비(小兒痲痺)인 남(男)동생이 대소변(大小便)을 번갈아가며 하루에도 몇 차례나 처리(處理)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우여사(禹女史)는 모든 것을 팔자소관(八字所管)으로 돌리고 말없이 해냈다. 

이해심(理解心)이 많은 남편(男便)도 우여사(禹女史)가 일이 있거나 잠시 외출(外出)할 때는, 대신(代身) 장모(丈母)님을 지성(至誠)껏 모셔주는 바람에 눈물 겹도록 고맙기는 했지만, 그 밖에 여러 친지(親知)들의 날카로운 눈총은 그의 마음을 여러 번 울렸다고 한다. 

딸과 사위의 지극(至極)한 병간호(病看護)도 아랑곳없이 친정(親庭)어머니가 세상(世上)을 떠나자, 장례(葬禮)까지 손수 치러 주었으며, 지금은 거의 식물인간(植物人間)과도 다름없는 남(男)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다시 남은 정성(精誠)을 다 바치고 있다. 

남달리 인정(人情)이 많기로 소문(所聞)난 우여사(禹女史)는 슬하(膝下)에 외아들뿐이어서, 어릴 때 부모(父母)를 잃고 거리를 이리저리 방황(彷徨)하는 15세(歲)의 박봉현군(朴鳳鉉君)을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자신(自身)이 낳은 핏줄 이상(以上)으로 곱게 성장(成長)시켜 결혼(結婚)까지 시켰다. 

55세(歲)에 이른 불구(不具)인 남(男)동생을 이제 산 송자에 가까울 정도로 더욱 몸이 허약(虛弱)해져 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여사(禹女史)는 정성(精誠)을 다해 눈물겨운 정도(程度)로 알뜰히 보살펴 줬다. 

남편(男便)의 처남(妻男)에 대(對)한 이런 보살핌도, 별세(別世)하신 장모(丈母)에 대한 정성(精誠) 못지않게 고맙기만 했는데, 우여사(禹女史)가 자리를 비울 때는 우여사(禹女史) 대신(代身)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가 하면 구수하고 달콤한 옛날 이야기를 돌려주며 그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하였다. 

두 부부(夫婦)의 갸륵한 행실(行實)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효녀(孝女)이고, 세상(世上)에 다시없는 효자(孝子)라고 칭송(稱頌)이 자자하지만, 이들은 약속(約束)이나 한 듯 한결같이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인(仁)의 근본(根本)이 아니냐"라는 말로 자식(子息)된 도리(道理)를 다했을 뿐이라고 겸손(謙遜)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