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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結婚)하여, 눈 먼 시모(媤母)님과 말 못하는 시숙(媤叔)을 모셔야 했던 김귀상(金貴祥) 여사(女史)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은 마치 한 편(篇)의 드라마처럼 기구(崎嶇)하기만 하였다.
눈먼 시모(媤母)님을 때때로 밥을 한 술 두 술씩 떠먹여 드렸는가 하면, 정신박약(精神薄弱)으로 말을 못하는 시숙(媤叔)은 하루가 멀다 하고 행패(行悖)를 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이를 운명(運命)의 작란(作亂)으로 돌리고 시숙(媤叔)의 행패(行悖)와 주벽(酒癖)도 사랑과 인내(忍耐)로 이겨 나갔다.
슬하(膝下)에 11세(歲), 7세(歲), 4세(歲), 1세(歲)의 네 아들만을 둔 김여사(金女史)는, 그나마 생활(生活)의 지주(支柱)였던 남편(男便)마저 30세(歲)되던 해에 병(病)으로 잃게 되자, 어렵기만 했던 생활(生活)은 더욱 암담(暗澹)해졌다.
남편(男便)과 사별후(死別後) 그나마 단칸 셋방도 얻을 형편(形便)이 못되어, 움막집을 짓고 품팔이 노동(勞動)으로 근근 생계(生計)를 이어가면서 시모(媤母)님과 시숙(媤叔)을 봉양(奉養)하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시숙(媤叔)님도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는데, 김여사(金女史)의 눈물겨운 봉양(奉養)의 보람도 없이 3년(年)만에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가 시모(媤母)님께 바친 정성(精誠)은 극진했는데, 비근한 예(例)로 시모(媤母)님이 외출(外出)하고자 할 때는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그의 지팡이 구실을 하면서 안내(案內)했으며, 길을 걷다가 좋은 구경(求景)거리가 있으면 눈으로 보는 듯이 자상(仔詳)하게 설명(說明)을 해 드리는 등, 효녀(孝女) 심청(沈淸)이 못지않은 갸륵한 효성(孝誠)으로 시모(媤母)님을 모셨다.
그런데, 말 못하는 시숙(媤叔)은 제수(弟嫂)의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 않고 이런저런 행패(行悖)는 더욱 심(甚)해져만 갔고, 술독에서 헤엄치다시피 지내는 일도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이와 같은 성격적(性格的) 결함(缺陷)탓으로, 다른 시숙(媤叔)들도 그 망나니짓을 먼 산(山)의 불 구경(求景)하듯 모두가 외면(外面)하는 바람에, 김여사(金女史)의 고통(苦痛)만 가중(加重)되어 갔다.
그러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지금껏 32년간(年間)이란 긴 세월(歲月)동안 인내(忍耐)와 사랑으로 따뜻하게 섬겨 왔으며 슬하(膝下)의 네 형제(兄弟)도 남부럽지 않은 모범청년(模範靑年)으로 성장(成長)시켜, 지금은 모두가 사회(社會)의 훌륭한 일꾼으로서 각계(各界)에서 활동(活動)하고 있다.
비록 김여사(金女史)는 하천부지(河川敷地)에 마련한 가건물(假建物)에서 생활(生活)해 오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自身)보다 더 불우(不遇)한 이웃을 찾아서 식량(食糧)을 나눠 주기도 했고, 때로는 마을 노인(老人)들을 찾아가서 비록 몇 갑에 불우(不遇)한 것이지만, 담배를 나누어 드리는 등 경로사상(敬老思想)도 남달리 두텁기만 하였다.
그는 부녀(婦女) 새마을 운동(運動)에도 앞장서기도 했는데, 언제나 입버릇처럼 이웃 아낙네들에게 "오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맞는 내일(來日)도 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에 땀 흘려 일한 보람은 내일(來日)에 결실(結實)이 되고, 오늘을 놀며 즐기는 기쁨은 내일(來日)의 고역(苦役)으로 나타난다."는 말로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의 정신(精神)아래 우리 부여자(婦女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하자고 부르짖는 숨은 새마을 일꾼이 바로 김여사(金女史)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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