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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연(安季蓮) 여사(女史)가 살고 있는 중동(中洞)에서는 그의 놀라운 효행(孝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여(女)의 갸륵한 봉사정신(奉仕精神)은 온 마을의 화제(話題)가 되고 있다.
25년 전(年前) 중풍(中風)으로 전신(全身)이 마비(痲痺)가 되어 혼자서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시부(媤父)님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안아서 앉히고 눕히며,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내는 일이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안여사(安女史)는 지금껏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해 왔다.
생계(生計)를 위해 인근(隣近) 제지공장(製紙工場)에서 품팔이 노동(勞動)을 하면서, 한편으로 시부(媤父)님의 구환(救患)과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도맡아야 했던 안여사(安女史)는, 남편(男便)마저 32세(歲)의 젊은 나이로 사망(死亡)하자, 그의 짐은 더욱 무거워져 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일은 가난 때문에 1년(年)에도 몇 차례에 걸쳐 이리저리 삭월세방(朔月貰房)을 전전(轉轉)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기거(起居)하는 집은 대개가 판자집이었는데 그런 것쯤은 참을 수 있었지만, 삭월세방(朔月貰房)을 찾아서 이사(移徙)할 때마다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여자(女子)의 몸으로 시부(媤父)님을 등에 업고 가야 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해 추운 겨울에는 시부(媤父)님을 등에 업고 이사(移徙)길을 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뒹군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光景)을 목격(目擊)한 행인(行人)들조차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안여사(安女史)의 갸륵한 효심(孝心)에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어느 해는 두서너 달 건너 한 번씩 이사(移徙)를 해야 할 만큼 안여사(安女史)의 생활(生活)은 더욱 궁핍(窮乏)해져만 갔는데, 그는 조금도 불평(不平)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 없이 시부(媤父)님을 고이 등에 업고 새로운 셋방을 찾아가곤 하였다.
품팔이 노동(勞動)과 행상(行商)으로 하루 하루의 생활(生活)이 이어지는 나날이었지만, 시부(媤父)님께 드리는 식사(食事)는 변(變)함없이, 아니 가난에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오히려 종전(從前)보다 더 구미(口味)에 맞도록, 밥상(床)은 언제나 그의 정성(精誠)으로 가득 찼다.
그가 행상(行商)으로 부득이(不得已)집을 비울 때는, 자식(子息) 하나를 학교(學校) 결석(缺席)을 시켜서까지 조부(祖父)님을 돌보게 할 만큼 지성(至誠)을 다하여 봉양(奉養)해 왔다.
그의 갸륵한 행실(行實)은 마침내 "은혜(恩惠)를 생각하는 회(會)"에서 수여(授與)하는 효부상(孝婦賞)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비단 안여사(安女史)는 시부(媤父)님에게만 효행(孝行)을 다한 것이 아니고, 이웃 노인(老人)들에 대해서도 시부(媤父)님 못지않게 따뜻한 존경심(尊敬心)으로 공경(恭敬)했으며, 자녀(子女)들도 극진한 사랑으로 양육(養育)하였다.
세 자녀(子女) 모두를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교육(敎育)을 받을 수 있게까지 눈물겹도록 뒷바라지를 다해 온 안여사(安女史)그 자신(自身)은 국문해득(國文解得)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精度)의 무학자(無學者)였기에, 자녀(子女)들에 대한 교육열(敎育熱)은 더욱 대단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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