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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 새 생활을 개척한 장한 어머니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효부라고 말하는가 하면 열녀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장한 여성이라 하기도 하는데, 자랑스러운 그 주인공이 바로 최양순 여사이다.
그녀의 선친인 최상원 선생은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3.1독립운동에 연류, 옥고까지 치른 독립투사인데, 최여사는 그분의 2남3녀 중 막내딸이다.
최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물이 항상 우리에게 존재할 때 그 귀중함을 잘 모르고, 또한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자랄 때는 그 품속이 얼마나 그립고도 소중한 것인지 잘 깨닫지 못하기 쉽듯, 국가라고 하는 큰 품속에서 생활할 때는 그 고마움을 곧잘 잊기가 쉬운데,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 국가가 있고서야 내가 있는 것이다.”
최여사는 이와 같은 아버지의 교훈에 좇아 애국 기상의 얼을 이어받은 분으로서, 예절도 바를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며 집안의 일에도 몸소 참여하고 성의껏 부모님 일을 도와 드려 일찍부터 효녀라는 말을 들어왔다.
가정에서 내훈 등을 읽으며, 부도의 길을 닦아 온 최여사는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철도공무원인 오상익씨와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그런대로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해 오던 중, 불행하게도 5남매를 남겨두고 남편은 병사하고 말았다.
순간 최여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과 실의 속에서 몇 달 동안을 보냈는데, 그때 최여사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언제까지나 죽은 남편의 환상을 머릿속에 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당장 위협을 받고 있는 생활을 타개하기 위하여 행상 길에 나섰다.
시부모님을 지성껏 봉양하면서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훌륭하게 키워 보겠다는 그의 결심은 굳기만 했는데, 매일 행상 길에 나설 때 마다 시부모님께 꼭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자녀들 보는 앞에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불 때나 행상은 빼놓을 수 없는 생활수단이었으므로, 웬만큼 몸이 피곤하고 괴로워도 행상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수예품과 편물 등을 팔아 일곱 식구의 생계를 이어오던 중 김천여고의 매점을 인수하게 되어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했는데, 설상가상이라고나 할까, 친정부모를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될(큰아들 병사, 둘째아들 전사)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행이 시모님의 너그러우신 배려로 함께 모시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분이 함께 중풍으로 자리에 눕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고난까지 겹치게 되었다. 문 밖 출입을 못하게 되자 대소변을 받아냈으며 밤마다 문안을 드릴 때면, 두 분이 힘없이 얽혀서 일어날 듯 일어날 듯 하다가 쓰러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최여사는 속으로 눈물지으면서 더욱 따뜻한 손길로 보살펴 드렸다. 아무리 생활에 쫓겨도 매일같이 목욕을 시켜드린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고 중풍에 좋다는 약초라면 깊은 산골짝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약초를 구해다가 정성껏 달여 드렸다.
친정 부모님의 병구완에 힘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모님의 병구완과 봉양에도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러나 5년간에 걸친 눈물겨운 뒷바라지도 외면한 채 친정 부모님이 차례로 별세하시자,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장례와 제례를 다 치러, 가신 넋들을 정성껏 달래 드렸다.
최여사가 특히 고마워했던 것은 시모님의 너그러운 자비심이었는데, 친정 부모님이 그것도 중풍환자란 달갑잖은 사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눈살을 찌푸리는 일 없이 오히려 자신은 괜찮으니 환자들에게 추호라도 소흘함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 말씀이 계실 때마다 그는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했다고 한다.
친정 부모님이 타계하시자 76세의 시모님만이 남게 되었는데, 최여사는 더욱 지성으로 시모님을 모시는 한편, 아버지 없이 자란 다섯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도 그야말로 온신의 힘을 다 바쳤다. 최여사는 항상 자녀들에게
“불행할 때는 인내하고, 행운일 때는 긴장하라”는 말과 아울러 “꿀을 얻으려면 벌에 쏘이는 것도 견뎌야 한다”며 인내심을 깊이 심어주는 엄한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훌륭히 키워 보리라는 그의 굳은 집념은 헛되지 않아, 마침내 장녀는 효성 여대와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현재 효성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으며, 차녀 역시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했으며, 그리고 장남은 경북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후 현재 군의관으로, 차남 또한 경북대학교 경상학과에 재학 중이며, 삼녀는 영남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이와 같이 5남매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였을 뿐 아니라 5남매가 다같이 장학생의 자리를 지킨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다.
비록 이들 5남매는 편모슬하에서 자라나긴 했지만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극기만이 최대의 승리’라는 말로, 자나 깨나 이들에게 인내와 용기를 키워준 최여사의 숨은 노력과 희생이 없었던들 오늘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양가의 웃어른들을 지성으로 모시면서 현모양처의 길을 걸어온 최여사는 1968년에는 김천문화원에서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역시 1968년에 김천국민학교에서 마련한 장우회장상을, 또 1971년도에는 김천여자중학교장의 표창을 받을 만큼 그가 걸어온 길은 거룩한 자기희생이요, 남을 위한 박애와 봉사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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