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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양(崔英美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인생(人生)에 있어서 안으로 어진 아버지와 형(兄)이 없고, 밖으로 엄(嚴)한 스승과 벗이 없다면, 성공(成功)할 수 있는 사람이란 아주 적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어느 날의 훈화(訓話)를 항상(恒常)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고, 동리(洞里)에서는 이름난 효녀(孝女)로 그리고 학교(學校)에서는 모범생(模範生)으로 명성(名聲)을 떨치고 있는 훌륭한 소녀(少女)였다.
학급(學級)의 간부(幹部)이기도 한 최양(崔孃)은, 스스로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면서도 언제나 입가에 미소(微笑)를 띠면서 학우(學友) 상호간(相互間)의 친목(親睦)을 도모(圖謀)해 왔는가 하면, 그 자신(自身)은 가난하면서도 자기(自己)보다 더 불우(不遇)한 친구(親舊)를 보면,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무지개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그런데 최양(崔孃)의 가정환경(家庭環境)은 너무나 불행(不幸)했으니, 노무자(勞務者)로 생활(生活)을 이어온 아버지가 실직(失職)한 후(後) 어머니가 행상(行商)으로 6명(名)의 식구(食口)를 먹여 살려야 하는 어려운 처지(處地)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최양(崔孃)은, 학교(學校)에서 귀가(歸家)하기가 바쁘게 그 자신(自身)이 어머니 대신(代身)동생들의 뒷바라지는 물론(勿論), 실의(失意)에 빠져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도 알뜰하게 봉양(奉養)해야만 했다.
행상(行商)으로 어머니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꼭 마을 입구(入口)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다렸다가, 어머니의 손을 다정(多情)하게 꼭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으며, 밤에는 숙제(宿題)나 공부(工夫)에 앞서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러 준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自己)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심(甚)한 독감(毒感)으로 그의 어머니가 몸져 누워 있었을 때, 수중(手中)에 단 한 푼의 돈도 없어 약(藥)값 마련이 어렵게 되자, 급(急)히 고서점(古書店)으로 달려가 헌 책을 팔아서 약(藥)을 사오기도 하였다.
최양(崔孃)은 걸스카우트 단원(團圓)으로서도 열(熱)과 성(誠)을 다 바치고 있는데, 특(特)히 단원(團圓)들과 함께 고아원(孤兒院)을 방문(訪問)하여 춤과 노래와 과자(菓子) 등으로 위로연(慰勞宴)을 베풀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최양(崔孃)은 동리(洞里)에서도 예절(禮節) 잘 지키는 학생(學生)으로 칭찬(稱讚)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혹(或) 길에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길을 물으면,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목적지(目的地)까지 안내(案內)해 주는 고맙기 그지없는 길잡이 구실도 잘 하였고, 길 잃은 어린이를 목격(目擊)했을 때는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성의(誠意)도 보였다.
그를 아는 동민(洞民)들은 최양(崔孃)을 가리켜 "길잡이 이뿐이"라는 별명(別名)으로, 그의 갸륵한 선행(善行)에 아낌없는 칭찬(稱讚)을 보내고 있다.
그 자신(自身) 외출(外出)을 할 때나 돌아와서는 부모(父母)님께 반드시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의 예의(禮儀)를 꼭 지키고 있지만, 동생들에게도 실천(實踐)할 것을 타일러, 지금은 부모(父母)님께서 인사 받기가 바쁘다는 즐거운 비명(悲鳴)이 나올 정도로, 그의 형제(兄弟) 모두가 출필면(出必面, 反必面)을 생활화(生活化)하고 있다.
"근면(勤勉)과 성실(誠實)" 바로 이것이 그가 가슴 깊이 새기는 있는 좌우명(座右銘)이라고 했다.
최양(崔孃)은 1977년(年) 12월(月)에 대구시(大邱市) 교육장(敎育長)의 효행상(孝行賞)을, 1979년(年) 1월(月)에도 대구시(大邱市) 교육장(敎育長)의 선행상(善行賞)을 받기도 한 효녀(孝女)이자 모범학생(模範學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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