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태분(徐泰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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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주시 관명동
선행(善行) 서태분(徐泰粉 49세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亡)한다고 했지만, 암탉이 울어서 집안도 흥(興)하고 마을도 흥(興)하게 만든 자랑스러운 여성(女性) 새마을 지도자(指導者)가 있으니 그가 곧 서태분(徐泰粉)여사(女史)이다. 

서여사(徐女史)는 83세(歲)의 시부(媤父)님과 6.25 당시(當時) 전투(戰鬪)에서 부상(負傷)을 입은 상이용사(傷痍勇士)인 남편(男便)과 슬하(膝下)에 4남매(男妹)를 둔 다난(多難)한 가정주부(家庭主婦)였지만, 남달리 애향심(愛鄕心)이 두터워 새마을 지도자(指導者)로 활약(活躍)하면서 많은 실적(實績)을 남겼다. 

그가 펼친 활동상(活動相)은, 주(主)로 절미(節米), 저축(貯蓄), 가족계획(家族計劃) 등 여성위주(女性爲主)의 부녀사업(婦女事業)이었지만, 특(特)히 그는 11동(棟)의 불량주댁(不良主宅)을 깨끗한 새마을 주택(住宅)으로 개량(改良)하는 데 많은 공로(功勞)를 남겼다. 

그러나 그 공로(功勞)는 저절로 굴러온 것이 아니었으며, 때로는 주민(住民)들로부터 "암탉이 또 나서서 까분다."느니, "자기가 뭔데 남의 잔치에 대추 놓아라 밤 놓아라 하고 간섭이냐?"하는 등등의 비난(非難)과 비웃음의 화살을 받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농촌근대화(農村近代化)의 열쇠는 어디까지나 우리 농민(農民)들 자신(自身)이 지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마음을 근대화(近代化)시켜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끈덕지게 반대자(反對者)들을 설득(說得)시켜, 마침내 새마을 농업(農業)에 온 주민(住民)이 동참(同參)토록 하는 등 그의 활약상(活躍相)은 눈부시기만 했다. 

여성(女性) 새마을 지도자(指導者)로 6년(年) 동안 재직(在職)하면서, 그는 누구보다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남이 하지 않은 일과 남이 해결(解決)하지 못하는 일을 앞장서서, 실타래를 차분하게 풀어 나가듯 열심(熱心)히 구슬땀을 흘리며 일했다. 

오죽했으면 남편(男便)으로부터 "당신의 가정(家庭)은 이 곳이요? 아니면 마을 회관(會館)이요? "할 정도(程度)로, 서여사(徐女史)는 눈만 뜨면 마을의 발전(發展)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윤여사(尹女史)가 가정(家庭)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시부(媤父)님을 위해서 자기(自己)집 사랑방을 간이경노당(簡易敬老堂)으로 개조(改造)하여, 시부(媤父)님을 비롯한 10여명(餘名)의 마을 노인(老人)들이 매일(每日)같이 찾아와서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雰圍氣)를 조성(造成)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노인(老人)들에게 수시(隨時)로 맛있는 간식(間食)도 제공(提供)하는 등, 웃어른을 섬기는 그의 공경심(恭敬心)은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程度)였다. 

또한 몸이 불편(不便)한 남편(男便)을 위해서도,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알뜰히 정성(精誠)들여 섬기고 있으며 자녀(子女)들에 대(對)해서도 인자(仁慈)한 마음으로 골고루 돌보고 있다.

남달리 새마을 운동(運動)에 대해서 관심(關心)이 깊은 서여사(徐女史)는 "이제는 농민(農民)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새마을 지도자(指導者)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할 때마다."라고 역설(力說)하면서, 자조(自助), 자립(自立), 협동(協同)의 참뜻을 주민(住民)들에게 새겨 주고 있었다.

서여사(徐女史)야말로 지난날에 흔히 말하던 암탉이 아니라, 경주(慶州)가 낳은 훌륭하고 장(壯)한 새마을의 여기수(女旗手)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