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전봉희(田鳳熙)

페이지 정보

본문

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울진군 울진읍
열부(烈婦) 전봉희(田鳳熙) 39세

전봉희(田鳳熙) 여사(女史)가 결혼(結婚)한 것은 그가 22세(歲) 되던 해였는데, 막상 결혼(結婚)하고 보니 시가(媤家)에서는 부모형제(父母兄弟)도 없는 남편(男便)은 단신(單身)인데다. 농토(農土)마저 단 한 평(坪)도 없는 그야말로 빈 털털이었다. 

순간(瞬間) 그의 마음은 벼랑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안(不安)과 절망감(絶望感)에 휩싸였지만, 일단 백년가약(百年佳約)을 한 이상(以上) 모든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고 잘 살아보리라는 각오(覺悟)로 다시 마음을 굳게 바로 잡았다. 

가난은 죄(罪)가 아니라는 신념(信念)을 가지고, 몹시도 미안(未安)하게 생각하고 있는 남편(男便)를 오히려 격려(激勵)한 그는, 신혼(新婚)의 기쁨도 아랑곳 않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이웃 농가(農家)일을 도우며, 부부(夫婦)가 합심협력(合心協力)해서 힘차게 새 생활(生活)을 개척(開拓)해 나갔다. 

첫딸을 낳은 1965년(年)에 남편(男便)이 군(軍)에 입대(入隊)했고, 그 때 그는 뱃속에 두 번째 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느닷없이 남편(男便)이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사망(死亡)했다는 날벼락 같은 비보(悲報)를 접(接)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5세(歲)였고, 생후 1년(年)이 된 딸과 뱃속에 들어있는 남편(男便)의 씨가 유복자(遺腹子)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보(悲報)에 꼬박 3일간(日間)을 먹지도 않고 몸져 누운 그는, 그야말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기막힌 분수령(分水嶺)에 서게 되었다. 

이제 그의 행동여하(行動如何)에 따라서 가계(家系)가 끊어질 수도 있고, 어린 딸은 고아(孤兒)로, 그리고 뱃속에든 유복자(遺腹子)......, 역시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苦痛)속에서 또다시 며칠을 보낸 전여사(田女史)는, 마침내 '그렇다, 나마저 저 자식(子息)들을 버린다면 그들의 장래(將來)는 불행(不幸)뿐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굳게 다짐하면서 절망(絶望)과 실의(失意)의 난관(難關)을 과감(果敢)하게 박차고 벗어났다. 

다행(多幸)히 남편(男便)의 몸값으로 초가(草家) 1동(棟)과 밭 600평(坪)을 마련할 수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열심(熱心)히 땀흘려 일했고, 다음 해에는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분만(分娩)하는 경사(慶事)도 맛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청춘(靑春)을 아쉽게 생각한 이웃과 친구(親舊)들이 "靑春(청춘)이 아깝다. 더 이상(以上) 가난에 시달리지 말고 개가(改嫁)하라."는 등의 말로 그에게 은근히 재혼(再婚)을 권유(勸誘)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여사(田女史)는 단호(斷乎)하게, "내 남편(男便)은 그이 혼자뿐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유혹(誘惑)을 물리쳤다. 

이제 그로부터 15년(年)이 흐른 지금, 맏딸은 중학생(中學生)이 됐고 유복자(遺腹子)도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한 후 곧 중학교(中學校)에 진학(進學)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성장(成長)한 아들과 딸은 전여사(田女史)의 끝없는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成長)해 가고 있는데, 이들 남매(男妹)는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가르친 "존경(尊敬)을 받으려면 남에게 이익(利益)을 주어야 하며, 애정(愛情)을 받으려면 남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교훈(敎訓)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熱心)히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