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태순(徐台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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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주군 안정면
열부(烈婦) 서태순(徐台淳) 44세

노름꾼의 1남(男) 6녀(女) 중(中) 셋째딸로 태어난 서태순(徐台淳) 여사(女史)는, 불과(不過) 15세(歲) 때인 1952년(年)에 노름빚으로 팔려가 결혼(結婚)을 하였는데, 남편(男便)은 자그마치 그보다 13세(歲)나 위였을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벙어리면서 그 또한 노름꾼이었다. 

15세(歲)의 어린 소녀(少女)인 그의 생각에도 눈앞이 캄캄할 정도(程度)로 기가막힐 수 밖에 없었지만, 노름빚 때문에 팔려온 결혼(結婚)이어서 친정(親庭)아버지를 보아서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가(媤家)의 사정(事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시숙(媤叔)은 소아마비(小兒痲痺)였고 시부(媤父)님은 또한 귀머거리였으니, 서여사(徐女史)는 어린 마음에 탄식(嘆息)하면서 속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있었겠는가. 겨우 남의 소작농(小作農)과 날품팔이로 그날 그날의 생계(生計)를 이어온 이들 불구가족(不具家族)들은, 급기야 도박(賭博)으로 집까지 빼앗기고 남의 집 세방(貰房)을 전전(轉轉)하는 신세(身勢)가 되었으니, 그의 심정(心情)은 더욱 괴로울 수 밖에 없었다. 

서여사(徐女史)는 터지는 울분(鬱憤)과 분노(憤怒)를 참을 길 없이, 어느 날 밤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고 자살(自殺)을 기도(企圖)했지만, 마침 동리(洞 里) 사람들에게 발각(發覺)되어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지 못했던 비분(悲憤)의 날도 있었다. 

바로 그날 온 동민(洞民)들의 노여움은 대단하여 마침내 남편(男便)과 시숙(媤叔)을 불러놓고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남편(男便)과 시숙(媤叔)은 눈물을 흘리면서 새 사람이 될 것을 굳게 맹세(盟誓)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용기(勇氣)를 얻은 서여사(徐女史)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모두가 합심협력(合心協力)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새 가정(家庭)을 꾸며 보자고 호소(呼訴)를 하였다. 

서여사(徐女史)의 절실(切實)한 호소(呼訴)는 다음 날부터 즉각(卽刻) 행동(行動)으로 옮겨져, 그 자신(自身)손에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했는가 하면 남편(男便)도 열심(熱心)히 구슬땀을 흘리며 일했다. 

그로부터 10여년(餘年)의 세월(歲月)이 흐른 지금, 이들이 흘린 땀의 보람도 현실(現實)로 나타났으니 내 집을 마련할 것이 그 첫째 기쁨이었고, 그로부터 다시 몇 년 후(年後)에는 논 1,200평(坪)과 밭 1,00평(坪)을 마련하는 두 번째의 큰 기쁨을 만끽(滿喫)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편(男便)이 1979년(年)에 간경화증(肝硬化症)에 걸려 입원(入院)하게 되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지만, 정성(精誠)들여 극진히 간호(看護)한 보람으로 기적적(奇蹟的)으로 건강(健康)을 되찾게 되었다. 

비록 그의 남편(男便)은 말 못하는 벙어리이긴 했지만 부인(夫人)의 너무나 인간적(人間的)인 희생정신(犧牲精神)과 봉사정신(奉仕精神)에 감동(感動)되어, 그가 건강(健康)을 회복(恢復)하고 퇴원(退院)하는 날 병원(病院) 안팎이 떠나갈 정도로 서여사(徐女史)의 손목을 덥석 잡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는 바람에, 이들의 사연(事緣)을 알고 있는 다른 환자(患者)들도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몹시 억척스럽다고 해서 "억척 아줌마"란 별명(別名)이 붙은 서여사(徐女史)는 슬하(膝下)에 3명(名)의 자녀(子女)도 두었는데, 벙어리 아버지의 설움을 씻기 위해서라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보겠다는 서여사(徐女史)의 결심(決心)은 대단(大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