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연순(李延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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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내서면
효녀(孝女) 이연순(李延順) 24세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고 품행(品行)이 방정(方正)한 이연순양(李延順孃)은, 또한 마을에서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한 처녀(處女)로 칭송(稱頌)이 자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면성(勤勉性)과 성실성(誠實性)도 남달라 뛰어나, 그야말로 옥(玉)의 티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사(每事)가 만점(滿點)인 여성(女性)이었다. 

이양(李孃)은 지난 1970년(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고 떠돌이로 객지(客地)를 방황(彷徨)하고 있는 오빠 대신(代身), 17세(歲)의 어린 나이로 가장(家長)의 중책(重責)을 떠맡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생계(生計)를 위해 뛰어든 곳은 남자(男子)도 하기 힘든 면청사(面廳舍) 관리인부(管理人夫)였는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그에게 쥐어진 월급(月給)은 쥐꼬리 만하였다. 

그러나 그는 구순(九旬)에 이른 조모(祖母)님과 홀로 계신 어머님 등 다섯 식구(食口)의 연명(延命)이 그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疲困)해도 웃는 얼굴로 출퇴근(出退勤)하면서 어려운 생활(生活)을 근근 이어나갔다. 

더우기 그는 24세(歲)에 이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화장(化粧)하는 일 없이 돈을 아끼고 쪼개어 조모(祖母)님과 어머님 봉양(奉養)에만 힘써 왔는데,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飮食)을 사다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일용품(日用品)을 사다가 바치기도 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하고 따뜻한 효심(孝心)은 한 떨기 백합(百合)처럼 아름답고 향기(香氣)롭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동생이 중학교(中學校)에 입학(入學)했을 때도 그의 힘으로 학비(學費)를 마련하여 동생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는데, 어느 날 집에 불쑥 나타난 그의 오빠가 이양(李孃)의 고마운 행실(行實)에 감복(感服)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을 맹세(盟誓)하기도 했다. 

특(特)히 구순(九旬)에 이름 조모(祖母)님은 이양(李孃)을 극진(極盡)히 사랑했는데, 어느 날 그의 손목을 덥썩 잡고 하시는 말씀이. "얘야, 나도 이제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니?"하면서 뭔가 이양(李孃)이 해 줄 것을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그 무렵만 해도 조모(祖母)님은 일절(一切)의 기동(起動)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대소변(大小便)도 일일이 받아내어 처리(處理)해야 하는 그런 고된 나날이었다. 

하루는 며칠 전(前)에 귀뜀을 한 조모(祖母)님 말씀이 너무나 궁금해, 그 때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조모(祖母)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시면서 말뜻의 진의(眞意)를 숨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양(李孃)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듯 장에 뛰어가서 수의(壽衣)에 필요(必要)한 옷감을 사다가 조모(祖母)님 앞에 내어 놓았다. 

"할머님, 바로 이거죠? 할머님이 말씀하신 게 바로 이게 아닙니까?" 아니다 다를까. 이양(李孃)의 예상(豫想)은 적중(的中)했고, 그것을 기쁜 표정(表情)으로 보석(寶石)을 감정(鑑定)하듯 요모조모 어루만지는 조모(祖母)님 얼굴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가난 속에서나마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효심(孝心)의 꽃을 피우고 있는 이양(李孃), 두고두고 박수(拍手)를 보내 주고 싶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주변(周邊)사람들의 찬사(讚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