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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분양(鄭玉粉孃)은 8남매(男妹) 중(中) 장녀(長女)로 태어나, 공무원(公務員)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단락(團樂)했던 이 가정(家庭)에 먹구름이 몰려온 것은 그가 13세(歲) 되던 해 공직(公職)을 떠난 아버지가 사업(事業)에 실패(失敗)한 후(後)부터였다.
가산(家産)을 송두리째 탕진(蕩盡)해 버린 아버지는, 그로 인(因)한 충격(衝擊)과 허탈감(虛脫感)으로 매일(每日)같이 술독에서 헤매다가 끝내 정신(精神)이 오락가락하는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단락(團樂)하기만 했던 이 가정(家庭)의 보금자리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단칸 세방(貰房)을 전전(轉轉)하는 비참(悲慘)한 처지(處地)까지에 접어들게 됐으며, 끝내 13세(歲)의 어린 정양(鄭孃)마저 생활(生活)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날이 갈수록 생활(生活)고는 어려워져만 갔다.
국민학교(國民學校)마저 중퇴(中退)한 정양(鄭孃)은 언제부터 시장(市場) 한 모퉁이에서 10원짜리 풀빵을 구워서 팔기 시작했다.
학교(學校)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급생(同級生)들이, 그의 가련(可憐)한 모습을 바라보며 동정(同情)의 눈길을 보낼 때마다 그는 혀를 깨물면서 몇 번이나 남몰래 울기도 했고, 때로는 조소(嘲笑)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로 보는 동급생(同級生)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꾹 참고 빵 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린 그는 '이제 우리 집안의 기둥은 바로 나다. 비록 내가 어리기는 하지만 가정을 위해서 최선(最善)을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속으로 다짐하면서 소녀가장(少女家長)구실을 어엿하게 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상(精神異常)으로 며칠 동안 어디론가 출가(出家)했던 아버지가 열차사고(列車事故)로 팔을 절단(切斷) 당(當)하는 비보(悲報)에 접(接)하게 되었다.
정신이상(精神異常)에다 불구(不具)까지 겹친 아버지는 처참(悽慘)할 정도였다.
90만(萬)원이란 엄청난 병원비(病院費)를 가까스로 갚아 낸 정양(鄭孃)은, 한편으로는 풀빵 장사를 계속(繼續)하면서 불쌍한 아버지를 지성(至誠)껏 봉양(奉養)하였다.
어느덧 그도 시집갈 나이가 됐지만, 그의 결심(決心)은 이미 딴 방향(方向)으로 굳어져 있었다.
'급(急)한 것은 나의 결혼문제(結婚問題)가 아니라, 이 가정(家庭)을 다시 재견(再建)하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진심(眞心)이었으니 가장(家長) 구실을 하고 있는 정양(鄭孃)의 몸부림은 대단하기만 하였다.
지금은 가게를 세(貰)내어 간이주점(簡易酒店)을 경영(經營)하고 있는 정양(鄭孃), 그의 힘으로 여(女)동생 2명(名)은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졸업(卒業)시켰고, 남(男)동생 2명(名)은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각각(各各) 진학(進學)시켜 청운(靑雲)의 꿈을 키워 주고 있다.
아버지는 고향(故鄕)에 있기를 싫어하므로 안동(安東)에 거주(居住)하는 조모(祖母)님 댁(宅)으로 모셨는데, 매월(每月) 생활비(生活費)를 그가 대 주고 있으며 수시(隨時)로 조모(祖母)님 댁(宅)을 찾아가서, 지금도 실의(失意)와 절망(絶望)의 늪에서 방황(彷徨)하고 있는 아버지를 극진히 위로(慰勞)해 드리고 있다.
이제 30세(歲)를 바라본 노처녀(老處女)이지만, 그는 아직도 결혼문제(結婚問題)는 그림의 떡으로만 만족(滿足)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동생들을 위해 할 일이 태산(泰山)만 같다는 정양(鄭孃), 아버지 대신(代身) 가족(家族)을 위해 희생(犧牲)한 정양(鄭孃)이야말로 효녀(孝女) 심청(沈淸)이 못지않다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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