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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녀(金玉女) 여사(女史)는 18세(歲)의 꿈 많은 소녀시절(少女時節)에 부모(父母)가 정(定)해준 지금의 시가(媤家)로 시집왔다.
비록 시가(媤家)의 생활환경(生活環境)은 남들처럼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남편(男便)의 따뜻한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단락(團樂)한 가정(家庭)을 꾸려 나갔다.
그런데 뜻밖의 불행(不幸)이 김여사(金女史)에게 들이닥쳤으니, 그것은 곧 군복무중(軍服霧中)인 남편(男便)이 사고(事故)로 사망(死亡)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비보(悲報)였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엄연(儼然)한 현실(現實)이었으며, 따라서 결혼(結婚)한지 3년(年)만에 즉(卽) 그의 나이 21세(歲)때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自身)이 당(當)한 슬픔보다는, 졸지에 아들을 잃은 시부모(媤父母)님을 위로(慰勞)해 드리는 일이 더 급선무(急先務)였기에, 김여사(金女史)는 눈물을 감추고 극진히 위로(慰勞)해 드리는 한편 여가장(女家長)으로서의 임무(任務)를 다하리라는 굳은 결심(決心)으로 그로부터 손에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하여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 나갔다.
시부모(媤父母)님께서는 며느리 보기가 몹시도 딱하고 애처로웠는지, 자식(子息)도 없는데 재가(再嫁)해서 새로운 생활(生活)을 개척(開拓)해 나가라고 권유(勸誘)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하고 다시 일터를 향(向)해 발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사실(事實) 김여사(金女史)는 혼인신고(婚姻申告)도 하지 않고, 지금껏 살았기 때문에, 재혼(再婚)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 출발(出發)을 할 수 있었지만, '나마저 두 노인(老人)을 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인간애(人間愛) 때문에, 그의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평생(平生)을 바치겠다는 결심(決心)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비단 그의 시부모(媤父母)님뿐만 아니라, 그를 아끼는 많은 친지(親知)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지금껏 혼인신고(婚姻申告)도 하지 않았고, 또한 자식(子息)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꽃다운 청춘(靑春)을 그 집안에서 썩히고 있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눈 딱 감고 재가(再嫁)하라"는 선의(善意)의 충고(忠告)가 빗발쳤지만, 확고(確固)하게 다져진 그의 결심(決心)만은 돌이키기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저 여자(女子)는 팔자(八字)가 사나워서 죽을 때까지 저 고생(苦生)을 할 것이다."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김여사(金女史)의 마음은 일편단심(一片丹心)이었다.
온갖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을 이겨가면서 지금껏 시부모(媤父母)님과 함께 살아온 지도 어언(於焉) 27년(年) 지금에 와서는 그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김여사(金女史)의 참뜻을 이해(理解)하고 깊이 머리를 숙이며 존경(尊敬)과 함께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김여사(金女史)는 남달리 애향심(愛鄕心)도 두터워, 새 마을 가꾸기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구슬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이 마을 여성(女性)들의 기수(旗手)로서 훌륭한 부녀지도자(婦女指導者)의 역할(役活)을 다 하고 있으며 '하면 된다!'는 집념(執念)인 그의 신앙(信仰) '근면정신(勤勉精神)'을 마을 구석구석까지 깊이 심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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