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윤위영(尹渭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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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문경군 점촌읍
효부(孝婦) 윤위영(尹渭榮) 35세

80고령(高齡)의 노시부모(老媤父母)님과 3남(男) 1녀(女) 등 8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을 거느리는 주부(主婦)로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1년(年)을 하루같이 화목(和睦)한 가정(家庭)을 만들고, 더우기 효부(孝婦)와 열녀(烈女)라는 이름까지 지니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윤위영(尹渭榮) 여사(女史)이다. 

중학교(中學校) 시절(時節)부터 그는 '인지행막대어효(人之行莫大於孝)'라는 즉(卽) 사람의 행위(行爲)에서, 효(孝)보다 큰 것은 없다라는 말을 곧잘 인용(引用)할 정도로, 효부(孝婦)의 길을 실천(實踐)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데, 비근(卑近)한 예(例)로 노시모(老媤母)님의 위약(慰藥)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리는 것이 좋을까 하고 고심(苦心)한 나머지, 자기(自己)집 사랑방을 경노당(敬老堂)으로 개조(改造)한 후(後) 그 곳에 장기와 바둑판을 비롯하여 고담서석(古談書籍)과 잡기(雜記), 라디오 등 온갖 오락품(娛樂品)과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비치(備置)하여 놓고, 동리(洞里) 노인(老人)들이 함께 와서 즐길 수 있도록 훈훈한 인정(人情)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 하나만 보아도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5년(年) 동안 경노당(敬老堂)을 찾아가서 시부모(媤父母)님과 함께 소일(消日)하는 노인(老人)들을 위해 수시(隨時)로 간식(間食)과 중식(中食)을 대접(待接)하는 등, 웃어른들을 공경(恭敬)하는 그의 마음씨는 그지없이 아름답기만 하였다. 

그런데, 막 노동(勞動)을 해 오던 남편(男便)이 결핵(結核)으로 몸져 눕는 바람에 여덟 식구(食口)의 생계(生計)가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도 윤여사(尹女史)는 조금도 낙담(落膽)하지 않고 식기류(食器類)를 둘러메고 행상(行商)길에 나서서 가계(家計)를 이끄는 한편,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서도 그가 지닌 정성(精誠)을 모두 쏟아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생활환경(生活環境)임에도 불구하고, 수십리(數十里) 행상(行商)길에 나섰다가 귀가(歸家)할 때는 반드시 경노당(敬老堂)의 모든 웃어른들에게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을 잊지 않고 실천(實踐)해 왔을 뿐만 아니라, 쪼들리는 가난 때문에 생활(生活)이 어렵기는 했지만, 종전(從前)과 같이 경노당(敬老堂)을 찾아오는 10여명(餘名)의 노인(老人)들에게 하다못해 국수라도 대접(待接)할 정도(程度)로 그의 갸륵한 경로심(敬老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었다. 

사랑방을 개조(改造)하여 마을 경노당(敬老堂)으로 개방(開放)하고 있기는 하지만, 윤여사(尹\女史)는 나름대로 큰 보람을 느낀 듯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방안을 깨끗이 닦는가 하면, 특히 겨울에는 온도방(溫突房)에 항상(恒常) 불을 넣어 노인(老人)들이 편히 쉬면서 놀 수 있도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自己)의 식구(食口)들도 아닌 이웃 노인(老人)들에게까지 근(近) 5년(年) 동안을 시부모(媤父母)님 모시듯 공경(恭敬)해 온 그의 행실(行實)은, 말은 쉽지만 실천(實踐)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서 그에 대한 칭송(稱頌)의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 높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좋은 약(藥)이 있으면, 수십리(數十里)길도 마다않고 걸어가서 기어코 약(藥)을 구(求)해다 남편(男便)에게 복용(服用)시키는 등, 부내부천(夫乃婦天)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그의 갸륵한 행동(行動)은 누가 보나 탄복(歎服)해 마지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