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정백근순(鄭自近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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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도개면,동
효부(孝婦) 정백근순(鄭自近順) 50세

정백근순(鄭自近順) 여사(女史)는, 부자(父子)와 자식간(子息間)의 지극(至極)한 사랑의 행동(行動)으로 보여 준 산 증인(證人)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꽃피운 사랑의 향기(香氣)는 거룩하기만 하였다. 

항상(恒常) 가난을 숙명(宿命)처럼 여기며 살아온 정여사(鄭女史)는, 10년 전(年前)부터 노환(老患)으로 병고(病苦)에 시달리고 있는 80고령(高齡)의 시부(媤父)님과 시모(媤母)님을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해 왔는데, 3년전(年前)부터는 두 분이 약속(約束)이나한 듯 함께 기동(起動)이 어렵게 되면서 바깥 출입(出入)도 못하게 되자 그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한 방(房)에 두 분이 나란히 누워 병석(病席)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드나들며, 두 분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만 했고, 머리를 감기고 목욕(沐浴)을 시키고, 그리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일 등, 정여사(鄭女史)의 하루 일과(日課)는 무척이나 고달프기만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남편(男便)마저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이 바람에 당장 일곱 식구(食口)의 호구책(糊口策)이 문제(問題)가 되어, 남자(男子)들도 힘겨운 막 노동(勞動)으로 간신히 생계(生計)를 꾸려가는 한편,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의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이 산(山) 저 산(山)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쉴 새 없이 이 방(房) 저 방(房)을 드나들면서 간호(看護)의 손길을 고루고루 나눠 주는 정여사(鄭女史)야 말로 쉴 틈이라곤 전연(全然)없는 신세(身勢)였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정여사(鄭女史)는,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웃어른들에게 대해서도 핏줄보다 진할 정도로, 예의범절(禮儀凡節)에서부터 공경(恭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만점(滿點)일 만큼 경로사상(敬老思想)도 두텁기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원(病院) 응급실(應急室)만 같은 위급(危急)한 생활환경(生活環境)임에도 불구(不拘)하고 지역사회(地域社會) 개발(開發)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정여사(鄭女史)이기도 한데, 특(特)히 마을 회관(會館) 건립(建立)과 용수로(用水路) 개발사업(開發事業) 이 밖에 벼신품종(新品種) 재배(栽培)는 어느 누구보다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성과(成果)를 거두어 이웃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感銘)을 주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새마을 부인회(婦人會)를 조직(組織)하여 절미(節米), 저축운동(貯蓄運動)은 물론, 이 밖에 각종(各種) 부녀사업(婦女事業)에도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자조(自助), 자립(自立), 협동(協同)의 의지(意志)와 신념(信念)을 마을 부녀자(婦女子)들에게 깊게 심어 주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경쟁(競爭)과 눈부신 발전(發展)의 시대(時代)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현대(現代)에서 우리가 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는 더 큰 분발(奮發)이 있어야 하겠고, 더 큰 노력(努力)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여사(鄭女史)는, 1974년(年)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경북도지사(慶北道知事)로부터 표창(表彰)을 받기도 한 숨은 새마을 일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