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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家庭)에서는 효자(孝子)로, 그리고 마을에서는 성실(誠實)한, 모범반장(模範班長)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곽동석씨(槨東錫氏)이다.
일찍 별세(別世)한 부친(父親)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遺産)은 가난이란 두 글자뿐, 그의 인생출발(人生出發)은 비참(悲慘)할 정도(程度)로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결혼(結婚)할 무렵 백수(白壽)가 넘은 시모(媤母)님도 함께 모시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중풍(中風)에 걸려 간호(看護)의 손길을 바라게 되었다.
낮에는 품삯일 등 농토(農土)에 매달려 일하면서, 시간(時間) 틈틈이 집으로 달려가 시모(媤母)님이 용변처리(用便處理) 등 이런저런 궂은 일을 그의 처(妻)와 번갈아 가면서 치러냈다.
그러나 병간호(病看護)의 보람도 없이 113세(歲)를 일기(一期)로 타계(他界) 하셨는데, 그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찬사(讚辭)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곧 "곽(槨) 효자(孝子)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천수(天壽)를 누리고 가셨다."는 것이 이들의 말이었다.
1974년(年)에 조모(祖母)님이 별세(別世)하신 그 이듬해인 1975년(年)에는, 또 그의 모친(母親)이 노환(老患)으로 눕게 됐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부(夫婦)가 단 한번도 찡그리는 일 없이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여 간호(看護)에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곽씨(槨氏)는 말 못하는 벙어리 형(兄)님까지 모시고 있는데, 말로는 의사소통(意思疏通)이 불가능(不可能)하기 때문에, 항상(恒常) 형(兄)님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린 후 정성(精誠)을 다하여 도와 주고 있다.
이제 그는 부인(夫人)의 알뜰한 생활(生活)과 그의 철저(徹底)한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논 2000坪과 밭 800평(坪)을 마련할 만큼 자립(自立)했고, 남달리 부지런하고 성실(誠實)한 면(面)이 인정(認定)되어 반장(班長)의 직책(職責)을 맡게 됐다.
반(班)의 기수(旗手)가 되면서부터 주택개량사업(住宅改良事業)을 비롯한 공동영농작업(共同營農作業) 등, 그가 마을에 기여(寄與)한 공로(功勞)는 대단하기만 했는데, 그런 사업(事業)을 할 때마다 먼 산(山)의 불 구경(求景)하듯 코웃음 치면서 반대(反對)를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럴 때면 그는 "새마을 운동(運動)은 5000년(年)의 묵은 가난을 씻어 주는 잘살기 운동(運動)이다."라고 역설(力說)하면서, 이들을 설득(說得)시켜 새마을 운동(運動)에 기꺼이 참여(參與)토록 했다.
특(特)히 그는 반내(班內) 전주민(全住民)에게 솔선(率先)하여 자조(自助),자립(自立),협동(協同)의 참뜻을 무엇인가를 행동(行動)으로 보여주는 실천가(實踐家)이기도 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살고 있는 석적면(石積面)에서도 모범반(模範班)으로 이름을 떨칠 만큼, 그가 흘린 구슬땀은 헛되지 않았다.
바쁜 농사(農事) 일에 쫒기면서도 노모(老母)님의 병간호(病看護)와 시중, 한편으로는 벙어리 형(兄)님에게 바치는 지극(至極)하고 한(限)이 없는 정성(精誠), 그리고 가장(家長)으로서의 자녀(子女)들에 대(對)한 사랑, 이 모든 것이 그의 따뜻한 인간성(人間性)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성실(誠實)과 근면(勤勉)' 이 다섯 글자가 바로 그가 이 세상(世上)에서 가장 아끼는 글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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