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종분(李鍾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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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도군 청도읍
효부(孝婦) 이종분(李鍾粉) 40세

가난한 집에서 7남매(男妹) 중(中) 막내딸로 태어난 이종분(李鍾粉) 여사(女史)는, 그가 출가(出嫁)한 시가(媤家)도 가난을 먹고 사는 딱한 집안이었다. 

남편(男便)은 초가(草家) 3간(間)이 그의 전재산(全財産)일 뿐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며, 반신불수(半身不隨)인 시모(媤母)님을 잘 봉양(奉養)해 달라는 것이 부군(夫君)이 아내에 대한 주문(注文)이었다. 

생계(生計)는 남편(男便)의 힘겨운 노동(勞動)으로 근근 이어갔고,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 등 병간호(病看護)는 이여사(李女史)가 맡아서 했다. 

그런데, 불행(不幸)하게도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당뇨병(糖尿病)으로 자리에 눕게 됨으로써 시모(媤母)님을 비롯한 네 자녀(子女)와 살아갈 길이 막막(漠漠)하기만 했다. 

'그렇다, 힘을 내서 살아야 한다. 이제 나마저 쓰러지게 되면 이 가정(家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여사(李女史)는 이와 같이 굳게 마음을 다짐하고, 다음 날부터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의 간호(看護)를 번갈아 하면서 품팔이를 비롯한 길쌈, 삯바느질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그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마자 으례 시모(媤母)님의 용변처리(用便處理)를 하여야 했고, 목욕(沐浴)도 시켜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시모(媤母)님 곁에서 신음(呻吟)하고 있는 남편(男便) 병간호(病看護)에도 그의 따뜻한 손길을 쥐어 주어야만 했으니, 그야말로 북 치고 나팔 부는 격(格)으로, 진종일(盡終日) 노동(勞動)에 지친 피로(疲勞)를 단 한 시(時)도 풀 길이 없었다. 

어떨 때는 그 자신(自身)이 지칠 대로 지쳐서 코피를 흘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만큼 그의 나날의 일과(日課)는, 그야말로 노동(勞動)과 간호(看護)의 반복(反復)이었다.

남편(男便)은 그 여(女)의 극진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외면(外面)한 채 1976년(年)에 끝내 타계(他界)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이여사(李女史)의 짐은 더욱 무거워져 갔다. 

지금은 국가(國家)에서 지급(支給)하는 극빈자(極貧者) 구호양곡(救護糧穀)과 그의 품팔이로 생계(生計)를 이어가면서 자녀(子女)들을 키우는 한편, 시모(媤母)님 병간호(病看護)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까지 근(近) 20년간(年間)의 긴 세월(歲月)을 시모(媤母)님을 위해 몸바쳐 온 이여사(李女史)는, 인고(忍苦)의 한국적(韓國的) 어머니 상(像)이라고나 할까. 지겹고 괴로운 20년간(年間)의 간호(看護)를 "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과 함께 "그것은 고뇌(苦惱)와 인고(忍苦)의 길이 아니라, 행복(幸福)과 평화(平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지닌 효(孝)에 대한 신념(信念)은 아름답고 거룩하기만 했다. 

이여사(李女史)는 지금껏 걸어온 그의 일생(一生)이, 병간호(病看護)로 얼룩지면서 모진 가난과도 싸워야 했지마는, 자녀(子女)에게는 항상(恒常) "곱고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엄(嚴)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마음의 때와 마음의 상처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 바로 이것이 그의 생활신조(生活信條)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