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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생(蔣庚生)여사(女史)의 비극(悲劇)은 6.25 사변(事變) 당시(當時) 시(媤)동생이 강원도(江原道) 전투(戰鬪)에서 전사(戰死)하고, 이어서 이 가정(家庭)의 유일(唯一)한 기둥이었던 남편(男便)마저 10년 전(年前)에 사망(死亡)하는 사람에, 행복(幸福)의 꿈은 허물어지고 비극(悲劇)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는 79세(歲)인 불구(不具)의 시모(媤母)님과 어린 자식(子息) 4명(名)을 부양(扶養)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게 되었다.
12년 전(年前)부터 불구(不具)의 몸이 된 시모(媤母)님은, 밤이나 낮이나 병석(病席)에 누워 있을 정도로 장여사(蔣女史)의 절실(切實)한 간호(看護)의 손길이 필요(必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종일(盡終日) 병석(病席)만을 지켜 있을 수도 없는 가정형편(家庭形便)이어서 간병(看病)은 어린 자녀(子女)들에게 맡겨 놓고 그는 공사장(工事場)을 찾아가, 남자(男子)도 하기 힘드는 막노동(勞動)을 했다.
일을 하다가도 그는 문득 병상(病床)에 계시는 시모(媤母)님이 걱정이 되어, 현장감독(現場監督)의 눈치를 살피며 급(急)히 집으로 뛰어가 이런 저런 시중을 끝낸 후 다시 돌아와 일을 하기도 했는데, 간혹 현장감독(現場監督)의 호된 꾸지람과 함께 해고(解雇)를 당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새로운 일터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일자리 없을 때는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에 쫓기고 굶주리고, 80고령(高齡)의 병(病)든 시모(媤母)님께만은 하다못해 쌀죽이라도 끓여 드릴 정도로, 극진히 봉양(奉養)하는 그의 갸륵한 마음씨는 하늘도 탄복(歎服)할 정도(程度)였다.
공사장(工事場)에서 힘겨운 노동(勞動)을 하다가 먹지 못해 빈혈(貧血)로 쓰러진 일도 있었는데, 동료(同僚)들의 도움으로 병원침대(病院寢臺)에서 응급치료(應急治療)를 받을 때도 "내가 집에 없으면 시모(媤母)님 돌볼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서 치료(治療)가 끝나기가 바쁘게 집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비단 그는 시모(媤母)님에게뿐만 아니라, 동리(洞里)에서도 노인(老人)을 공경(恭敬)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행실(行實)이 뛰어나 칭찬(稱讚)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특(特)히 장여사(蔣女史)는 남달리 싫어하는 온갖 궂은 일은, 자신(自身)이 맡아서 처리(處理)하는 등 남달리 봉사정신(奉仕精神)도 두터웠다.
비록 그는 가난은 했지만, 자식(子息)들에 대해서도 자상(仔詳)한 인자(仁慈)의 손길과 한(限)없이 넓은 덕(德)으로 그들의 양육(養育)한 결과(結果), 지금은 네 자녀(子女) 모두가 모범학생(模範學生)으로 자라 장여사(蔣女史)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고 있다.
어버이 봉양(奉養)을 극진히 하는 효행(孝行) 앞에는, 꿩이 스스로 날아와 땅에 떨어지고, 사슴이 스스로 마당에 들어와 잡혔다는 고사(故事)나 일화(逸話)도 있듯이, 그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도 언젠가는 가난을 물리치고 찬란한 태양(太陽)을 맞이하는 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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