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조금조(趙錦祚) 여사(女史)는 가난한 어촌(漁村)으로 시집을 가서 부덕(婦德)과 효성(孝誠)을 시가(媤家)에 깊이 심어 준 자랑스러운 여성(女性)이다.
시가(媤家)는, 바닷가의 오막살이 초가삼간(草家三間)이 남편(男便)의 전재산(全財産)이었고, 거기에다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63세(歲)의 시부(媤父)님과 56세(歲)의 시모(媤母)님, 그리고 고집(固執)쟁이로 소문(所聞)이 자자한 시(媤)누이 4자매(姉妹)의 날카로운 눈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 이었다.
남편(男便)은 고깃배를 따라다니는 뱃군이어서, 자연 조여사(趙女史)가 가장(家長) 구실을 해야 했지만, 눈만 뜨면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고 사정(事情)없이, 퍼붓는 시(媤)누이들의 간섭(干涉)에 남몰래 눈물지을 때도 많았지만, '시집가면 벙어리가 돼야 한다.'는 굳은 결심(決心)으로 그가 해야 할 가사(家事)를 말없이 열심(熱心)히 꾸려 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중풍(中風)으로 몸져 누운 시부(媤父)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精誠)을 다 쏟아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나 시(媤)누이들의 눈길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대추 놓아라 감 놓아라 하면서 조여사(趙女史)의 신경(神經)에 불을 붙이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참는 것이 약(藥)'이라는 명언(名言)을 머리 속에 새기며, 웃음으로 공격(攻擊)의 화살을 피(避)하곤 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나 할까. 시집살이 1년(年)도 못하고 친정(親庭)으로 도망(逃亡)갈 것이라던 이웃 주민(住民)들의 기우(杞憂)와는 달리, 날카롭기만 하던 시(媤)누이들도 조여사(趙女史) 행실(行實)에 감동(感動)되어 지금은 '형(兄)님 먼저 아우 먼저'할 정도로 화목(和睦)하다.
그런데 고개를 넘으면 또 산(山)이 나오듯이, 그의 장남(長男)이 소아마비(小兒痲痺)로 고생을 하다가 끝내 치료(治療)의 빛도 못보고 하체불구(下體不具)인 앉은뱅이가 되는 바람에, 중환자(重患者)가 2명(名)으로 늘어나는 불행(不幸)을 맞게 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안방과 웃방을 드나들며 간호(看護)의 손길을 뻗쳐 온 조여사(趙女史)는, 그 자신(自身)이 피로(疲勞)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이에 조금도 굴(屈)하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뱃군이란 직업(職業)에 실증을 느낀 남편(男便)이, 매일(每日)같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면서 그의 마음을 괴롭혔는데, 1970년(年) 6월(月)에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 후(後) 조여사(趙女史)는 막 노동(勞動)과 생선행상(生鮮行商) 등으로 가계(家計)를 돕는 한편, 푼푼이 저축(貯蓄)한 돈으로 주택(住宅)도 개량(改良)하고, 밭도 600평(坪)을 사들여 새 출발(出發)의 기쁨을 맞게 됐다.
그러나 운명(運命)의 신(神)은 그를 그대로 놓아 두지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풍랑(風浪)을 만나 남편(男便)이 영원(永遠)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절망(絶望)앞에서 굴(屈)하지 않고 그가 낳은 5남매(男妹)를 위해, 그리고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시모(媤母)님을 위해, 더욱 굳건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다.
그의 힘으로 시(媤)누이들도 모두 시집 보낸 조여사(趙女史)는, 1975년(年)에 병곡중학교(柄谷中學校) 육성회장(育成會長)으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하였다.
- 이전글제23회 독행상(篤行賞) 정재한(鄭載漢) 25.05.15
- 다음글제23회 독행상(篤行賞) 방경화(方景花) 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