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천남이(千南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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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송군 진보면
효부(孝婦) 천남이(千南伊) 45세

천한계씨(千漢桂氏)와 권실이씨(權實伊氏) 사이에서 4남매(男妹) 중(中) 막내딸로 태어난 천남이(千南伊) 여사(女史)는, 16세(歲)란 어린 나이에 유계수씨(柳桂秀氏)와 결혼(結婚)하였다. 

시댁(媤宅)에는 앞 못 보는 시모(媤母) 김월이씨(金月而氏)와 찢어질 듯한 가난만이 나이 어린 며느리 천여사(千女史)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 한 평(坪)없이 모자(母子)가 단 둘이 살고 있는 이 가정(家庭)에는, 어느 쪽을 흟어보아도 가난의 때가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을 뿐, 훈훈한 곳은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천여사(千女史)와 결혼(結婚)한 남편(男便)은 돈벌이를 한답시고 사흘이 멀다하고 객지(客地)에서 보냈는데, 어떤 때는 한 달도 좋고 1년(年)도 좋을 정도로 모든 가사(家事)는 천여사(千女史)에게 맡기고 방랑생활(放浪生活)을 계속(繼續)해 나갔다. 

한편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과 동거(同居)를 하고 있는 그는 시모(媤母)님의 화장실(化粧室) 출입(出入)을 비롯한 모든 기동(起動)하나하나에 세심(細心)한 신경(神經)을 쏟으면서, 그의 손이 되기도 했고 발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시모(媤母)님의 마음이 되기도 하면서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우선(于先) 당장 급(急)한 것이 호주지책(糊口之策)이어서, 김매기를 비롯한 방아찧기, 삯바느질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열심(熱心)히 땀 흘려 일하면서, 한편으로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을 위해 정성(精誠)을 다 바쳐 극진(極盡)하게 모셨다. 

그 딱한 생활(生活)을 보다 못한 진보수체국장(進寶郵遞局長)이, 그의 남편(男便)을 불려들여 우체국(郵遞局)에 취직(就職)까지 시켜 주었지만, 잦은 전동(轉動)으로 모든 가사(家事)는 자연 천여사(千女史)가 맡아서 꾸려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의 시모(媤母)님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盲人)이었지만, 천여사(千女史)가 외출(外出)할 때는 눈뜬 사람에게 대하는 것보다 더 자세(仔細)하게 반드시 

"어디 어디를 다녀오겠습니다."고 말씀 드리고, 또한 외출(外出)에서 귀가(歸家)했을 때도 

"어디 어디를 다녀왔습니다."고 필(必)히 말씀 드리는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 인간(人間)의 기본예절(基本禮節)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기이목(樂其耳目)이란 말 뜻 그대로 시모(媤母)님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일도 잊지 않았는데, 예(例)를 들면 천여사(千女史)가 외출(外出)을 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영화(映畵)필름처럼 재미있게 들려 드리는 일들을 들 수 있겠다. 

그의 효행(孝行)이 오죽이나 지극(至極)했으면 92세(歲)에 이르는 시모(媤母)님이 큰 병(病) 하나 없이 오늘의 건강(健康)을 유지(維持)할 수 있었을까. 

피눈물 나는 고생(苦生)으로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가면서 시모(媤母)님을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해 온 그의 행적(行績)이 마침내 온 고을에 퍼져, 1963년(年)에는 청송군수(靑松郡守)로부터 효행표창(孝行表彰)을 받기도 하였다. 

30여년간(餘年間)을 고생(苦生)만 한 탓인지 그는 과로(過勞)에 지쳐 오히려 시모(媤母)님보다 더 늙어 보일 정도로 백발(白髮)이 많아 보이기만 했는데, 바로 그것이 천여사(千女史)가 빛낸 '효(孝)라는 거룩 한 훈장(勳章)'이 아니고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