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최복희(崔福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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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의성군 춘산면
효부(孝婦) 최복희(崔福喜) 60세

최복희(崔福喜) 여사(女史)는 6.25의 비극(悲劇)을 지닌 여인(女人)으로, 19세(歲)에 결혼(結婚)하여 10여년(餘年)의 짧은 결혼생활(結婚生活)을 끝으로, 그의 남편(男便)은 전란(戰亂)이 휘몰아친 포연(砲煙)속으로 사라졌다. 

당시(當時) 그의 나이 30세(歲)였고, 시부모(媤父母)님과 3남매(男妹)의 자녀(子女)들이 모시고 거느려야 할 식구(食口)들이었는데, 곁들여 가난의 고통(苦痛)도 함께 감수(甘受)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여가장(女家長)이란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낮에는 남의 품삯일과 막 노동(勞動)으로, 그리고 밤에는 갓 바느질로 생활(生活)을 겨우 이어갔지만, 때로는 그것도 부족(不足)해서 눈물을 삼키면서 남의 집을 찾아가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다 또 노환(老患)으로 매일(每日)같이 자리에 누워 계시는 시부모(媤父母)님 봉양(奉養)도 게을리 하지 않고 보살펴야만 했는데, 특(特)히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이 더욱 어려워졌을 때도, 도저히 약(藥)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자신(自身)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약(藥)값에 보태기도 하였다. 

아무리 시부(媤父)님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여성(女性)의 상징(象徵)인 머리칼을 자를 수가 있느냐고 말하는 아낙네들도 더러는 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최여사(崔女史)는 "하잘것없는 머리칼로 사람 목숨 하나 구(救)한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대답(對答)하면서, 머리칼을 잘라낸 것을 손톱만큼도 후회(後悔)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품삯 일터에서 제공(提供)하는 중식(中食)도 먹는 체 흉내만 낼 뿐, 송두리째 종이에 싸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시부(媤父)님께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하늘도 감복(感服)할 정도였다. 

비록 보리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지언정, 시부(媤父)님께만은 쌀밥과 쌀죽으로 대접(待接)할 만큼 그의 효성(孝誠)은 참으로 놀랍기만 했는데, 어느 날은 그나마 끼니도 마련할 길이 없어 밖으로 뛰어나가, 또 다시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하여 시부(媤父)님의 굶주림을 채워 드린 일도 있다고 한다.

또한 맛있는 고기를 대접(待接)할 길이 없어, 손수 논바닥을 헤매며 미꾸라지를 잡아다가 추어탕을 끓여 드린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그러나 그의 알뜰한 보살핌도 외면(外面)한 채 1969년(年)년에 시부(媤父)님이 별세(別世)하심으로써 고난(苦難)길 40년(年)의 긴 고뇌(苦惱)도 잠시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이제는 모진 고생(苦生) 끝에 그의 자녀(子女)들도 모두 결혼(結婚)시키고, 손자(孫子) 손녀(孫女)들의 재롱을 받아가면서 지난날의 어려웠던 기억(記憶)들을 되새겨 보고 있는 최여사(崔女史)는, 그가 머리까지 삭발(削髮)하여 시부(媤父)님의 약(藥)값을 마련했던 효행(孝行)으로, 1960년(年)에 춘산면노인회(春山面老人會)로부터 효행상(孝行賞)을 받은 바도 있는데, 자녀(子女)들에게도 효도(孝道)의 길을 알뜰히 가르쳐 왔으므로, 이들도 감화(感化)되어 모두가 한결같이 효자(孝子), 효녀(孝女)란 칭찬(稱讚)을 듣고 있다. 

한 평생(平生)을 하루같이 고생(苦生)을 낙(樂)으로 삼으며,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효행(孝行)만으로 살아왔던 최여사(崔女史), 정말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효행상(孝行像)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