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조을순(趙乙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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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옥포면
효부(孝婦) 조을순(趙乙順) 55세

조을순(趙乙順) 여사(女史)는 19세(歲)에 윤씨(尹氏) 가문(家門)으로 출가(出嫁)하여 가난하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불편(不便)없이 시(媤)어른 모시고 단락(團樂)한 생활(生活)을 하였다.

26세(歲)가 되던 해에 6.25 사변(事變)이 발발(勃發)하니, 남편(男便)은 용약(踊躍) 조국(祖國)을 휘하여 군(軍)에 입대(入隊)하여 용감(勇敢)히 싸우다가 팔공산전투(八公山戰鬪)에서 산화(散華)하였다. 

많은 젊은이가 나라를 위(爲)하여 목숨을 초개(草介)같이 버린 일이 수없이 많았으나 나만이 당(當)하는 슬픔으로만 여겨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날이 암담(暗澹)할 뿐이었다. 

철없이 방긋거리는 어린것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자식(子息)을 잃은 슬픔에 비통(悲痛)해 하는 시부(媤父)님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비통(悲痛)의 극(極)이었다. 

시부(媤父)님을 위로(慰勞)하고 자신(自身)의 슬픔을 삼키면서 앞날을 생각해 보았으나 거저 막막(漠漠)할 뿐이었다. 

평소(平素)에 건강(健康)이 좋지 않으셨던 시부(媤父)님이, 아들이 전사(戰死)한 충격(衝擊)으로 관절염(關節炎)과 기관지천식(氣管支喘息)이 더욱 악화(惡化)되어 몸을 쓸 수 없게 되어 자리에 눕게 되니, 조여사(趙女史)는 시부(媤父)님과 자식(子息)을 위하여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하기로 결심(決心)하였다. 

젊음을 손짓하는 유혹(誘惑)과 개가(改嫁)의 권유(勸誘)도, 그에게 강(江)건너 불 보듯이 나와 무관(無關)한 것으로 그저 웃어 넘길 뿐이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하고 다만 삶에 열중(熱中)하자니 가릴 것 없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였다. 

농사(農事)일, 공사(工事)판 일 등 점심(點心)을 걸러 가면서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병중(病中)에 계시는 시부(媤父)님을 구완을 위하여 점심(點心)때가 되면, 약(藥)과 점심식사(點心食事)를 따뜻하게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석양(夕陽)길을 맥없이 걸어 환자(患者)만이 기다리고 있는 쓸쓸한 초가(草家)집에 들어서면 자신(自身)의 가엾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다. 

어느덧 외아들이 자라 학교(學校)에 들어가니 학비(學費)가 염려(念慮)되었으니, 이를 악물고 이것만은 준비(準備)함에 소홀(疎忽)하지 않았으나 때로는 부족(不足)하여 애를 태우기도 하였다. 

아들의 성적(成績)이 우수(優秀)하니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몰랐다. 

가산(家産)이라고는 논 일두락(一斗落)밖에 없었는데, 아들이 고려대학(高麗大學)에 입학(入學)하게 되자 이를 팔아서 진학(進學)시켰다. 

병중(病中)에 계시는 시부(媤父)님도 좋아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들이 학교(學校)를 마치고 취직(就職)하여 가사(家事)를 돕게 되니 생활(生活)은 일취월장(日就月將) 좋아졌으나, 병중(病中)에 30년간(年間)을 신고(辛苦)하시던 시부(媤父)께서 별세(別世)하시니 조여사(趙女史)의 애통(哀痛)함은 비길 데가 없었다. 

평생(平生)을 의지(依支)하고 시탕(侍湯)과 봉양(奉養)을 해 온 보람도 없이 돌아가시자, 성(誠)을 다하여 장례(葬禮)하니 애절(哀切)함만이 가슴에 가득 할 뿐이었다. 

시부(媤父)님을 위하여 한 평생(平生)을 희생(犧牲)한 효심(孝心)은 이웃은 물론 천하(天下)가 본받아야 할 만하다. 

시부(媤父)님의 영전(靈前)에 소복(素服)하고 단정히 앉은 조여사(趙女史)의 눈에는 눈물이 샘 솟듯이 흐르고, 히끗히끗한 그의 귀밑머리는 한(恨)많던 지난날을 말하여 주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