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명자(權明子)

페이지 정보

본문

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구미시 원평동
효부(孝婦) 권명자(權明子) 34세

권명자(權明子) 여사(女史)는 , 금릉군(金陵郡) 남면(南面) 월명동(月明洞)의 소농(小農)으로 전답(田畓) 1,500평(坪)을 경작(耕作)하는 권석준씨(權錫俊氏)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빈한(貧寒)한 가정형편(家庭形便)으로 국민학교(國民學校)를 마치고 가사(家事)를 돌보게 되었다. 

1963년(年) 18세(歲)가 되던 해, 미장(美匠)일을 하는 임동수씨(林東洙氏)와 결혼(結婚)하였다. 

마장공(美匠工)의 가난한 생활(生活)은 매우 어려워, 신혼(新婚)이라 하지만 단간방(單間房)에 시(媤)어머님을 모셔야 하니 더욱 기막힌 형평(形便)이었다.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하여 공사장(工事場)에서 날품팔이를 해 가면서도, 노경(老境)에 계시는 시모(媤母)님을 모시는데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나, 결혼(結婚)한지 4년(年)만에 시모(媤母)님께서 중풍(中風)으로 쓰러져서 하반신(下半身)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不具者)가 되고 말았다. 

권여사(權女史)는 불구(不具)가 된 시모(媤母)님의 봉양(奉養)과 어려운 가정형편(家庭形便)에 대하여 조금도 불평(不平)하는 일 없이, 불구(不具)가 된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는 물론, 좋다는 약(藥)과 용하다는 의원(醫院)을 두루 찾아 김천(金泉), 성주(星州), 칠곡(漆谷), 등지(等地)를 다니면서, 13년(年) 동안을 효성(孝誠)을 다한 시탕(侍湯)과 봉양(奉養)의 보람으로 하늘이 감응(感應)하였던지 점차 호전(好轉)되어, 지금은 조금씩이기는 하나 기동(起動)할 수 있게 되니, 권여사(權女史)는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호전(好轉)되어 가는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에 모든 일을 기쁨으로 대하고 있다.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가 다시 악화(惡化)되지나 않을까 하며 살얼음을 디디고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 신경(神經)을 한결 곤두세우고 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아껴 사는 것이 몸에 밴 권여사(權女史)는, 꿋꿋한 의지(意志)로, 막노동(勞動)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에 정성(精誠)을 다하며,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마침내 500만(萬)원이란 거금(巨金)을 모아 3년전(年前) 3간(間)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자녀(子女)들에 대한 교육열(敎育熱)이 또한 남달리 대단하였으므로, 힘에 겨운 생활(生活) 속에서도 최소한(最小限)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는 여하(如何)한 난관(難關)이 닥치더라도 진학(進學)시키겠다는 결심(決心)으로 현재(現在) 고등학교(高等學校) 1명(名), 중학교 2명(名), 국민학교 3명(名) 등 6남매(男妹)를 모두 취학(就學)시키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감명(感銘)해 마지않을 일은, 그렇게도 어려운 가운데서 경로정성(敬老精誠)이 투철(透徹)한 권여사(權女史)는, 어버이날에는 이웃 노인(老人) 20명(名)을 새로 지은 자기(自己)집에 초대(招待)하여 극진히 대접(待接)하고 있다. 

이 갸륵한 마음씨는 더욱 더 이웃을 감동(感動)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事實)이 구전(口傳)으로 전파(傳播)되니 듣는 이마다 칭찬(稱讚)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모(媤母)님의 부치(不治)의 병(病)이 점차 치료(治療)되어짐은, 권여사(權女史)의 시모(媤母)님을 완쾌(完快)시키려는 효성(孝誠)의 일념(一念)에서 이루어진 병세(病勢)의 호전(好轉)이었기에, 우리들에겐 산 교본(敎本)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