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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李仁淑) 여사(女史)는 1950년(年) 21세(歲)가 되던 해 이(李)원백씨(氏)와 결혼(結婚)하였다.
신혼(新婚)의 보금자리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4개월(個月)만에 남편(男便)은 병(病)으로 사망(死亡)하였다.
죽음의 이별(離別)이 이렇게도 뼈에 사무치도록 아플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삶의 회의(懷疑)하고 감상(感傷)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삶의 고달픈 현실(現實)이 이여사(李女史)를 채찍질하였다.
들려오는 개가(改嫁)의 권유(勸誘)도 귓전으로 흘려 버리고, 이 가문(家門)의 쓰러진 기둥을 다시 세우기에 온갖 힘을 다했다.
비통(悲痛)을 이기지 못하는 시모(媤母)님을 위로(慰勞) 봉양(奉養)하고, 매일(每日)매일(每日)의 삶에 열중(熱中)하는 이여사(李女史)의 고초(苦焦)는 눈물겹도록 측은(惻隱)하였다.
품팔이로 이어온 고생스럽긴 세월(歲月)도 벌써 20년(年)이 흘렀다.
서로 의지(依支)하고 위로(慰勞)하면서 살아온 고부간(姑婦間)은 마치 모녀 간(母女間)처럼 정(情)다웠고, 그런 대로 단락(團樂)하여 웃음소리도 더러는 새어 나왔다.
신(神)의 시련(試鍊)은 아직도 남았던지, 1970년(年) 시모(媤母)님께서 안질(眼疾)이 나서 앞을 못 보시게 되니, 푼푼이 모아 둔 돈으로 치료(治療)했더니 요행으로 시력(視力)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시력(視力)을 되찾아 기뻐하는 시모(媤母)님보다도 이여사(李女史)가 마치 자기(自己) 시력(視力)을 찾은 것처럼 좋아하였고, 이웃들도 시모(媤母)님에 대(對)한 자부(子婦)의 정성(精誠)에 하늘의 감응(感應)하였다고 격찬(激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2년전(年前)부터 안질(眼疾)이 재발(再發)하여 앞을 못 보게 되니, 이여사(李女史)은 온갖 정성(精誠)을 쏟아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치료(治療)에 진력(盡力)하였으나 별(別)다른 효험(效驗)을 보지 못하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작년(昨年) 시모(媤母)님께서 불의(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當)하여 입원(入院)하게 되니,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시모(媤母)님의 치료(治療)에 전념(專念)하게 되었다.
7개월(個月)이란 긴 입원기간(入院期間)동안 효성(孝誠)을 다하여 간병(看病)했고 얼굴 한 번 찡그린 일 없이 잘 시중을 들었다.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몸으로 퇴원(退院)은 했으나, 불구(不具)의 시모(媤母)님 시중이 전(前)보다 배(倍)로 늘어났다.
장님에다가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몸이 되었으니, 홀로 두고 바깥의 일도 자유(自由)로이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생활(生活)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실망(失望)하지 않고 대소변(大小便)의 처리(處理)와 세탁(洗濯)을 위한 외부활동(外部活動)까지 해야 하니 갑절의 노력(努力)이 들었다.
일찍 남편(男便)을 여의고 혈육(血肉) 일점(一點)없는 자신(自身)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시모(媤母)님을 위(爲)해, 효심(孝心)하나로 살아온 이여사(李女史)야말로 하늘이 내린 효부(孝婦)라 아니 할 수 없다.
중학교(中學校)에 다니는 친척(親戚)조카를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이를 락(樂)으로 삼으며,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와 봉양(奉養)을 천직(天職)의 사명(使命)으로 알고 불평(不平)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여사(李女史)의 생활태도(生活態度)야말로, 무너져가는 사회윤리(社會倫理) 속에서 만인(萬人)이 우러러야 할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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