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임분년(林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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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포항시 득양동
효부(孝婦) 임분년(林粉年) 75세

임분년(林分年) 여사(女史)는 1960년(年) 16세(歲)의 어린 나이로 인근부락(隣近部落)의 가난한 농부(農夫)에게 시집을 갔다.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어려운 생활(生活)속에서도 신부(新婦)의 행복(幸福)을 누리면서 살았다. 

26세(歲)가 되던 해 갑작스레 남편(男便)이 사망(死亡)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내려앉는 아픔이었으나, 모든것을 운명(運命)으로 돌리고 오히려 아들을 잃은 애통(哀痛)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시모(媤母)님을 위로(慰勞)하는 처지(處地)가 되었다. 

가까운 친척(親戚) 하나 없으니 앞날을 의론(議論)할 곳도 없고, 전도(前途)가 암담(暗澹)한 청상과부(靑孀寡婦)의 마음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심정(心情)이었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생각하니, 나는 젊었으니 백난(百難)을 헤칠 수 있는 능력(能力)과 용기(勇氣)가 있으나, 시모(媤母)님은 늙고 기력(氣力)이 쇠진(衰盡)하였으니 누구를 의지(依支)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방황(彷徨)하지 말고 내가 일어나야지 하고 굳게 다짐하였다. 

처음에는 이웃들도 위로격려(慰勞激勵)하였으나, 남의 일이라 쉬 잊혀지고, 또 있다 하여도 별(別)로 도움도 되지 않았다. 

살려고 백방(百方)으로 발버둥쳤으나 갈 길이란 노동(勞動)을 파는 길밖에 없었다.

마음과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남편(男便)의 무덤을 멀리 바라보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으나, 슬픔만 더할 뿐 현실(現實)은 미동(微動)의 변화(變化)도 있을 수 없었다. 

친정(親庭)을 찾아 보기도 했으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일언(一言)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기로 하고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고, 열심(熱心)히 농사(農事)일이랑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해서 근근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너무나 고달픈 생활(生活)이 계속(繼續)됨에 때로는 개가(改嫁)를 권(勸)하는 주위(周圍)의 말이 임여사(林女史)의 마음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오갈 곳 없는 시모(媤母)님을 버린다면 강상(綱常)을 범(犯)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오싹함을 느꼈다. 

천명지도(天命之道)로 생각한 자기(自己)의 운명(運命)은, 오직 시모(媤母)님의 봉양(奉養)뿐으로 결론(結論)지은 임여사(林女史)는, 열심(熱心)히 일하고 시모(媤母)님을 위로(慰勞)하고 봉양(奉養)하는 데만 전력(全力)하였다. 

단(單) 두 식구(食口)가 서로 의지(依支)하고 위로(慰勞)하며 살아가던 중(中), 시모(媤母)님께서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되지 앞이 캄캄하였다.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목욕(沐浴), 세탁(洗濯) 등의 일, 백리(百里)를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여 써 보았으나, 그 정성(精誠)에도 보람없이 와병(臥病)한 지 7년(年)이 되어 별세(別世)하시니, 이제는 천애고아(天涯孤兒)처럼 혼자만 남게 되었다. 

실의(失意)에 잠겨 있던 며칠은 먼 친척(親戚)과 이웃의 위로(慰勞)도 있었지만, 정작 혼자 남게 되자 정말 견디기 힘들었으나, 용기(勇氣)를 내어 생선(生鮮)장수, 떡장수 등 갖가지 행상(行商)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갔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친정부친(親庭父親)이 별세(別世)하시고 노모(老母)만 남게 되니 모시지 않으면 안될 처지(處地)가 되어, 친정모친(親庭母親) 모신 지가 어언 20년(年)이 흘렀다. 

지금은 99세(歲)된 노모(老母)와 여생(餘生)을 같이하고 있다. 

이 사실(事實)이 당국(當局)에 알려지자 구호대상자(救護隊像者)로 책정(策定)되어 구호양식(救護糧食)으로 생활(生活)하고 있다. 

혈육(血肉) 일점(一點)없이 청춘(靑春)을 시모(媤母)님을 위하여 희생(犧牲)하고, 시모(媤母)님 별세 후(別歲後)에는 친모(親母)를 극진히 모시는 효심(孝心)은, 매말라가는 현세(現世)에 경로효친(敬老孝親)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