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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자(沈美子) 여사(女史)는 사남매(四男妹) 중의 장녀(長女)로 태어나, 집이 가난하여 겨우 국민학교(國民學校)를 마치고 집에서 가사(家事)도 돌보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도 도맡았으며, 천성(天性)이 순(順)하고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스러워서 일찍부터 효녀(孝女)라는 이름이 났었다.
1972년(年) 24세(歲)가 되던 해 유인희씨(柳仁熙氏)와 결혼(結婚)하였다.
남편(男便)은 어릴 때 소아마비(小兒痲痺)로 반신불수(半身不隨)인 불구자(不具者)였다.
시가(媤家)에는 87세(歲)의 시조모(媤祖母)님, 64세(歲)의 시모(媤母)님뿐으로 생활능력(生活能力)이 없는 상태(狀態)였기 때문에, 심여사(沈女史)가 활동(活動)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形便)에 있었다.
불구(不具)인 남편(男便)과 기동(起動)이 불편(不便)한 노시조모(老媤祖母)님과 시모(媤母)님, 정말 앞일이 막막(漠漠)하여 신혼(新婚)의 기쁨이란 조금도 누릴 수 없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運命)이라 체념(諦念)하고 내일(來日)을 위(爲)한 삶의 길을 모색(摸索)하기에 몰두(沒頭)하였다.
친정(親庭)에서 익힌 부도(婦道)와 효심(孝心)을 바탕으로 하고 가난한 생활에 익숙한 심여사(沈女史)는, 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마음먹고, 가사(家事)는 시모(媤母)님에게 맡기고 열심(熱心)히 일하였다.
채소밭 김매기, 과수원일,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였다.
근근(僅僅) 호구(糊口)하여 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가정(家庭)은 언제나 화목(和睦)하였다.
아이가 하나 둘 나게 되어 이제는 1남(男) 2녀(女)의 어머니가 되었다.
고생도 많았으나 나란히 누워 있는 이들 3남매(男妹)를 바라보면 자신(自身)도 모르게 힘이 솟아난다.
이제는 시조모(媤祖母)님이 95세(歲), 시모(媤母)님이 72세(歲)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시니, 그 시중도 들어야 하고 불구(不具) 남편(男便)시중도 들어야 하니 힘이 더 든다.
결혼(結婚)한지 9년째가 되었어도, 옷 한 벌 해 입지 못하고 화장품(化粧品)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였으나, 청춘(靑春)이 아깝다고 여인(女人)으로 돌아가서 한탄(恨歎)도 해 볼 겨를이 그에게는 없었다.
시조모(媤祖母)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일이 없다.
언제나 의복(衣服)을 깨끗하게 갈아 입히고, 남편(男便)에 대한 성심(誠心)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천부(天賦)의 길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불평(不平)하지 않았고 다만 묵묵(默默)히 할 일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行績)은 인근(隣近)의 본보기가 되어 듣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복(感服)케 하고 칭찬(稱讚)해 마지않는다.
오늘도 일곱 식구(食口)의 가장(家長)으로서 일터에 나가 일하는 그의 손끝에는, 하늘의 보살핌이 있고, 동료(同僚)의 축복(祝福)이 있고, 그의 두 눈에는 삶의 굳은 의지(意志)가 빛나고 있다.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向)하는 그의 가슴에는 무료(無聊)하게 기다리시는 두 시(媤)어른의 무사(無事)함을 염원(念願)하는 효심(孝心)으로 가득 차고 고달픔도 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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