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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주(崔金周) 여사(女史)는 1956년(年) 열 아홉 살 되던 해에 손종학씨(孫鍾鶴氏)와 결혼(結婚)하였다.
건축공사장(建築工事場)의 일용(日傭) 막 노동(勞動)으로, 편모(偏母) 슬하(膝下)에서 동생 셋과 가난한 생활(生活)을 하고 있었다.
벅찬 생활(生活)이 어린 신부(新婦)에게는 힘에 겨웠으나 그래도 신혼(新婚)의 달콤함에 힘든 줄을 몰랐고, 집안은 별고(別故)없이 평온(平穩)한 나날이었다.
시모(媤母)님에게는 공손(恭遜)하고 평소에 익힌 자부(子婦)로서의 도리(道理)를 다하였고, 시(媤)동생들에게도 우애(友愛)로써 친절(親切)과 봉사(奉仕)를 아끼지 않았다.
별고(別故)없이 15년(年)의 세월(歲月)이 흐르는 동안 시(媤)동생들은 성장(成長)하여 각기(各其) 독립(獨立)하였다. 1970년(年)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눕게 되었다.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된 시모(媤母)님은 남의 부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밥을 떠먹여 드리고 용변(用便)을 받아내고, 목욕(沐浴)을 시켜야 하고, 시탕(侍湯)을 해야하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해야 하고, 남편 뒷바라지, 어린것의 뒷바라지 등으로 최여사(崔女史)는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짜증을 내는 일 없었고, 특(特)히 시모(媤母)님에 대한 정성(精誠)은 지극(至極)하였다.
4년(年) 동안을 하루같이 시모(媤母)님에 효성(孝誠)을 다하던 1974년(年), 남편(男便)이 공사장(工事場)에서의 감전사고(感電死故)로 사지(四肢)를 절단(絶斷)하게 됐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이 캄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됐다.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치며 통곡(痛哭)하여도 시원치 않은 지경(地境)이었으나 정신(精神)을 가다듬고 냉정(冷靜)을 되찾았다.
병중(病中)에 계시는 노시모(老媤母)께서도 몸도 자유(自由)롭지 못한데 그 마음이야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 내가 용기(勇氣)를 내고 정신(精神)을 차려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오히려 시모(媤母)님을 위로(慰勞)하였다.
그러나 남편(男便)의 사지절단(四肢絶斷)과 성불구(性不具)가 된 슬픔의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사고(事故) 2개월(個月) 뒤에,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시는 슬픔을 맞았으나, 최여사(崔女史)는 조촐한 장의(葬依)로 자식(子息)된 도리(道理)에 어긋나지 않게 예(禮)를 갖추어 장례(葬禮)를 치렀다.
냉혹(冷酷)한 현실(現實)앞에 가로놓인 6남매(男妹)와 불구(不具)가 된 남편(男便), 생각만 해도 암담(暗澹)하기만 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실의(失意)와 낙담(落膽)은 일곱 식구(食口)의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하고 비장(悲壯)한 결심(決心)을 했다.
'나는 이 가족(家族)을 이끌어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쌍한 이 가족(家族)을 살려야 한다.'고 되뇌이면서 생활전선(生活戰線)으로 뛰어들었다.
공사장(工事場)의 막노동(勞動), 연탄배달(煉炭配達), 파출부(派出婦) 등 닥치는 대로 뛰면서 어렵게 살아가지만 가정(家庭)은 언제나 화목(和睦)하다.
단칸방에 8명(名)이 기거(起居)하는 실정(實情)이지만, 자녀(子女)는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는 교육(敎育)을 시킬 작정(作定)으로 모두 학교(學校)에 보내고 있다.
그렇게도 시모(媤母)에게 효(孝)를 다하였는데도, 하늘이 무심(無心)하다고나 할까 이 여인(女人)에게 너무도 가혹(苛酷)한 시련(試鍊)을 주고 있다.
멀지 않아 최여사(崔女史)의 겹친 시련(試鍊)도 끝날 것이라고 주위(周圍) 사람들은 말하면서 그를 칭송(稱頌)하고 걱정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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