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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각농고(豊角農高) 3학년(學年)에 재학 중(在學中)인 조창래군(趙昌來君)은 조춘생씨(趙春生氏)의 자녀(子女) 3남(男) 1녀(女) 중(中)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는데, 가정(家庭)에서는 기특한 효자(孝子)로, 그리고 학교(學校)에서는 모범학생(模範學生)으로 칭찬(稱讚)이 자자할 만큼 그의 행실(行實)하나 하나가 성실(誠實)하고 갸륵하기만 하였다.
조군(趙君)은 풍각농고(豊角農高) 1학년(學年) 때 학급학생장(學級學生長)을, 그리고 2학년(學年)떄도 학급학생장(學級學生長)을 그리고, 3학년(學年)인 현재(現在)는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대대장(大隊長)을 지내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전교(全校)에서도 이름난 모범학생(模範學生)이었다.
조군(趙君)은 남달리 선행(善行)의 공적(功績)도 많았는데 중요(重要)한 내용(內容)을 간추려 보면, 1980년(年) 10월(月) 풍각면(豊角面)에 살고 있는 박경덕씨(氏)가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로 뇌막염(腦膜炎) 때문에 고생(苦生)을 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알고,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간부(幹部)들과 의논하여 전교생(全校生) 상대(相對)로 모금(募金)을 실시(實施), 여기서 모금(募金)된 20만(萬) 4천(千)원을 그에게 전달(傳達)했고, 또한 그 해 연말(年末)에는 모곡(耗穀)을 하여 경로당(敬老堂)에 쌀 2말과 라면 2상자(箱子)를 보내어 외로운 노인(老人)들을 위로(慰勞)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내체육대회(校內體育大會)가 있었던 그 날은 빵을 판매(販賣)하여 여기서 얻은 수입금(收入金)으로 원호대상자(援護對象者) 자녀(子女) 11명(名)에게 학용품(學用品)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조군(趙君)은 가사(家事)에도 남달리 충실(忠實)했는데, 한 때는 신경통(神經痛)으로 고생(苦生)하시는 어머니를 대신(代身)해서 어머니의 병(病)이 완쾌(完快)될 때까지 밥짓기, 빨래하기 등, 여자(女子)도 하기 힘드는 뒷바라지를 해 왔을 뿐만 아니라, 밤을 꼬박 새우면서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하였다.
또한 조군(趙君)은 어려운 농촌생활(農村生活)과 집에서 하고 있는 소규모(小規模) 문방구점(文房具店)을 도우면서 한편으로 열심(熱心)히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1980년(年) 11월(月)에는 운경새마을 장학금(奬學金)을 받아서 부모(父母)의 도움 없이 자력(自力)으로 학비(學費)를 충당(充當)하기도 하였다.
이 박에도 조군(趙君)은 자전차(自轉車)를 타고 시골길을 돌아다니면서 국경조일(國慶弔日)에 국기(國旗)달기 계몽(啓蒙)을 실시(實施)해서 국가관(國家觀)과 애국심(愛國心)을 깊이 심어 주기도 하였다.
특히 풍각면(豊角面) 소재(所在) 보물(寶物) 113호(號)인 3층(層)석탑(石塔)을 바쳤다.
조군(趙君)은 가정(家庭)에서나 학교(學校)에서나 항상 자신(自身)보다 남을 위해 살아왔으며, 그의 좌우명(座右銘)도 "촛불은 남을 비추어 주고 자신(自身)은 불태운다."라는 표어(標語)로 정(定)했다고 한다.
자신(自身)보다 불우(不遇)한 학우(學友)들을 보면 눈물이 먼저 앞선다는 조군(趙君)은,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대대장(大隊長)으로 있으면서 항상 불우(不遇) 이웃돕기에 앞장서는 등, 따뜻한 그의 인간애(人間愛)에 전교생(全校生)은 마음 속으로 우렁찬 박수(拍手)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남자(男子) 또순이'로 불리는 조군(趙君)은, 학교(學校)에서는 '오뚜기'로 불릴 만큼 성실근면(誠實勤勉)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는 말에, 조군(趙君)은 다음과 같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 이전글제24회 독행상(篤行賞) 최재흥(崔在興) 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