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전두희(田斗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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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울진군 울진읍
효부(孝婦) 전두희(田斗姬) 67세

전두희(田斗姬) 여사(女史)는 22세(歲) 때 결혼(結婚)하여 67세(歲)의 백발노파(白髮老婆)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행복(幸福)에 젖어 웃어 본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程度)로 그가 걸어온 인생역정(人生歷程)은 가시밭길 그것이었다. 

방랑벽(放浪癖)이 심(甚)한 그의 남편(男便)이 결혼(結婚)한지 5년(年)만에 맏딸을 낳고 일본(日本)으로 훌쩍 떠나 버리니, 이때부터 전여사(田女史)는 남편(男便) 없는 가정(家庭)을 지키면서 힘겨운 농사(農事)일과 가사(家事)일을 돌보며 하루 속(速)히 남편(男便)이 돌아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방(解放)되던 해에 그 동안 편지(便紙) 한 장도 없던 남편(男便)이 5년(年)만에 귀가(歸家)하기는 했지만, 얼마 후(後) 또다시 어디론가 가출(家出)하는 바람에 전 여사(田女史)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이와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사이에 딸만 셋 얻게 되었고, 네 번째로 득남(得男)을 하게 됨에 비로서 2대(代) 독자(獨子)인 남편(男便)도 몹시나 반가운 듯 그날부터 그의 방랑벽(放浪癖)이 조금씩 수그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1962년(年) 12월(月)에 남편(男便)이 불행(不幸)히도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척추(脊椎)를 크게 다쳐 몸져 눕게 되었다. 

순간(瞬間) 전여사(田女史)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고 실의(失意)에만 빠질 수 없어 그 날부터 병원(病院)과 약방(藥方)을 두루 다니며 병구환(病救患)에 전념(專念)했지만,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고 말았다. 

병(病)든 남편(男便)을 보살피면서 6남매(男妹)를 양육(養育)해야 하는 전여사(田女史)는, 새로운 용기(勇氣)와 기대(期待) 속에 건어물, 미역, 과일,등 행상(行商)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산(山)고개를 넘으면서 열심히 장사를 하였다. 

행상(行商) 보따리를 이고 다니다가 소나기를 만나 보따리를 송두리째 계곡(溪谷)에 떠내려 보낸 일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등을 넘다가 뒹굴어서 무릎과 이마가 깨지는 등, 행상(行商)길 그 자체(自體)가 죽고 싶도록 괴롭기만 한 고난(苦難)의 길이었다. 

행상(行商)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男便)이 대소변(大小便)도 받아내야 했고 수시(隨時)로 더운 물로 목욕(沐浴)도 시켜야만 했다. 

특(特)히 전여사(田女史)는 남편(男便)의 무료(無聊)함과 허탈감(虛脫感)을 달래 주기 위해 사랑방을 남편(男便) 친구(親舊)들이 모여서 노는 휴식처(休息處)로 개방(開放)하고 있다. 

흔히들 마을에서는 이 휴식처(休息處)를 가리켜 경로당(敬老堂)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사랑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장소(場所)가 마련됨으로써 이 마을에는 경노사상(敬老思想)이 더욱 알차게 여물어 갔다. 

18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을 오직 남편(男便)의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시중으로 일관(一貫)해 온 그의 아름다운 부부애(夫婦愛)는 열녀(烈女) 이상(以上)의 찬사(讚辭)를 받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전여사(田女史)는, 지금도 간혹 꿈을 꾸다가 "여보, 제발 집을 좀 나가지 말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과거(過去) 남편(男便)의 방랑벽(放浪癖)을 헛소리로 욀 만큼 그의 한 평생(平生)은 웃음을 잃어버린 눈물의 한 평생(平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