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유분(鄭有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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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감천면
열부(烈婦) 정유분(鄭有粉) 47세

선천적(先天的)으로 온순(溫順)한 성품(性品)을 타고난 정유분(鄭有粉) 여사(女史)는, 소도시(小都市)인 영주(榮州)에서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화목(和睦)한 가정(家庭)에서 자라나 중학(中學)을 마친 후(後) 부모(父母)를 돕는다는 일념(一念)에서, 버스 안내양(案內孃)으로 취직(就職)까지 했던 그런 경력(經歷)을 가진 악착스러운 또순이었다. 

정여사(鄭女史)는 23세(歲)때 결혼(結婚)하였는데, 그 녀(女)를 맞은 시댁(媤宅)은 따뜻한 안식처(安息處)가 못되었다. 

집이라고는 부엌도 없는 초가(草家) 토담집 방(房) 2간(間)이 전부(全部)였고, 바로 이 곳에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비롯하여 시(媤)동생 등 9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이 기거(起居)해야 했으니, 신혼부부(新婚夫婦)를 위한 신방(新房)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시부(媤父)님과 시(媤)동생 4명(名)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빈한(貧寒)의 극(極)에 달(達)해 있었다. 

더구나 장남(長男)인 남편(男便)에게 더욱 큰 문제(問題)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국민학교(國民學校)조차 나오지 못한 입장(立場)이면서도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도박(賭博)에만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터라, 정여사(鄭女史)는 자신(自身)도 모르게 한숨만 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 가정(家庭)에서 5명(名)의 고용살이를 해서 연간(年間) 5천근(千斤) 정도(程度)의 벼 수입(收入)까지는 보장(保障)되고 있었지만, 여전(如前)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시댁(媤宅) 식구(食口)들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렇다. 내 힘으로 이 가정(家庭)을 일으키고 남편(男便)도 도박(賭博)이란 함정(陷穽)에서 구(救)해 내 보자.' 정여사(鄭女史)는 이와 같이 굳게 다짐한 후(後), 남의 땅을 빌어서 그 자신(自身)이 삽과 괭이를 들고 열심(熱心)히 농토(農土)를 가꾸기 시작하였다. 

남편(男便) 몰래 남의 땅을 빌어서 가꿔 온 지 며칠 후(後) 비로소 그 상황(狀況)을 직접(直接) 목격(目擊)한 남편(男便)은. 콧날을 시큰거리면서 아내의 손을 덥석 잡고 회개(悔改)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의 남편(男便)도 농토(農土)에 뛰어들어 구슬땀을 흘리면서 일하게 됐고, 이제는 화투장만 보아도 돌아앉을 만큼 그가 즐겼던 도박(賭博)은 멀리하게 되었다. 

한편 빈둥빈둥 놀고만 있던 시(媤)누이도, 정여사(鄭女史)가 버스 안내양(案內孃)으로 취업(就業)시켜 가계(家計)를 돕도록 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후(年後)에는 식구(食口)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아담한 벽돌집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시부(媤父)님이 머슴살이도 그가 청산(淸算)시켜 드리는 등, 정여사(政女史)의 눈부신 활약(活躍)은 놀라울 정도(程度)였다, 어디 그뿐이랴, 시(媤)동생들도 모두 성가(成家) 독립(獨立)시켰고, 그의 자녀(子女) 3명(名)도 고등학교(高等學校)를 졸업(卒業)시켰다. 

이로써 그의 시가(媤家)는 정여사(鄭女史)의 피나는 노력(努力)으로 자조(自助), 자립(自立), 협동(協同)의 기틀을 굳건하게 다지게 되어 보다 잘사는 내일(來日)의 행복(幸福)을 맞게 되었다. 

정여사(鄭女史)는 한편으로는 마을 부녀회장직(婦女會長職)까지 맡아서 새마을가꾸기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특(特)히 그는 씨가간(氏家間)의 불화(不和)를 화합(和合)의 길로 이끌어가는 등, 그가 마을을 위해 흘린 구슬땀은 고귀(高貴)하기만 하였다. 

"사업(事業)"의 의욕(意慾)도 없고 열성(熱誠)도 없는 부지런하지 못한 농민(農民)은, 백년(百年)이 가도 잘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새마을 또순이'란 별명(別名)이 붙을 만큼 성실(誠實)하고 부지런한 농촌여성지도자(農村女性指導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