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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조(金淳祚) 여사(女史)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年前) 그러니까 그가 21세(歲)때 배동하씨(裵東夏氏)와 결혼(結婚)하여 슬하(膝下)에 2남(男) 1녀(女)의 자녀(子女)를 두고 있다.
그의 남편(男便)은 목수(木手)로서 쥐꼬리만한 수입(收入)으로 근근 생계(生計)를 이어오는데,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의 뒷바라지를 해 오는 한편 자녀(子女)들도 알뜰히 보살펴 왔다.
나름대로 행복(幸福)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남편(男便)은 종전(從前)부터 앓아 오던 폐(肺)가 더욱 나빠져 만성결핵(慢性結核)의 지경(地境)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기동(起動)도 어렵게 되면서 진종일(盡終日) 병상(病床)에 눕게 되었다.
가정(家庭)의 기둥이었던 남편(男便)이 중병(重病)으로 눕게 되면서부터 당장 곤란(困難)해진 일은 생계(生計)의 방책(方策)이었다.
김여사(金女史)는 하루가 다르게 쪼들리는 비참(悲慘)한 생활(生活)을 더 이상(以上) '먼 산(山)의 불 구경(求景)'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어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식모(食母)살이를 비롯한 식당(食堂) 종업원(從業員) 등의 온갖 노동(勞動)으로, 가계(家計)를 생활(生活)를 꾸려가면서 남편(男便)의 병치료(病治療)를 위해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몇 푼 버는 돈으로 약(藥)값과 5명(名)의 식생활(食生活)을 이어가다 보니 좀처럼 해서 심적(心的)으로나 물질(物質)의 여유(餘裕)도 생기지 않았다.
이처럼 겹치는 가난 속에서 툭하면 폐결핵가족(肺結核家族)이라는 이유(理由)로 세방(貰房)을 쫒겨나기가 일쑤였고, 다시 방(房) 한 칸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굴욕(屈辱)도 감수(甘受)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그럴수록 악착같이 일을 해서 남편(男便)을 살려 내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밤에도 홀치기와 삯바느질로 그 날 그 날의 생계(生計)를 이어가면서 남편(男便)의 병(病)을 알뜰히 보살펴 주었다.
뭣보다도 병석(病席)에 있는 남편(男便)의 의지(意志)가 약(弱)해질까 봐, 그 어려운 역경(逆境)속에서도 자녀(子女)들을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進學)케 하여 남편(男便)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언젠가 남편(男便)이 복용(服用)하는 약(藥)이 떨어져 다시 약(藥)을 사야만 했는데, 마침 수중(手中)에 한 푼의 돈도 없자 그는 생각다 못해 어느 식당(食堂)으로 달려가서 얼마간 일해 주기로 약속(約束)하고 거기서 받은 선금(先金)으로 남편(男便)의 약(藥)을 사 오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그가 일하는 식당(食堂)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불고기를 싸 가지고 와서 영양실조(營養失調)의 남편(男便)을 보(補)하기도 하는 등 남편(男便)을 위한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놀랍기만 했다.
지금까지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를 해 온 지도 어언 수년(數年)의 세월(歲月)이 흘렀지만, 폐결핵(肺結核)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꺾이지 않고 김여사(金女史)의 마음을 더욱 초조(焦燥)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조금도 낙담(落膽)하지 않고 언젠가는 남편(男便)의 병(病)이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처럼 쾌청(快晴)하게 가실 날이 꼭 오라는 것을 확신(確信)하면서, 오늘도 남편(男便)에게 따뜻한 미소(微笑)를 던져 주고 일터로 나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듯이 건강회복(健康恢復)의 날도 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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