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박칠조(朴七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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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군 영천읍
열부(烈婦) 박칠조(朴七祚) 43세

달걀에 인생(人生)과 미래(未來)를 걸고 숱한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극복(克服)하면서, 참된 행복(幸福)을 향(向)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부부(夫婦)가 있다. 

이 인간승리(人間勝利)의 주인공(主人公)은 오늘도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몸을 휠체어에 담고 달걀을 팔기 위해 영천읍내(永川邑內)를 거미줄처럼 누비고 있는 박칠조(朴七祚) 여사(女史)와 김수복씨(金守福氏)가 바로 화제(話題)의 인물(人物)이다. 

박여사(朴女史)는 19세(歲) 때 결혼(結婚)했는데, 그 녀(女)의 남편(男便)은 3세(歲)때부터 소아마비(小兒痲痺)로 두 다리를 못쓰는 불구자(不具者)였다. 

'내가 불쌍한 저 사람을 위해 마음의 등불이 되어 주겠다.' 이와 같은 박여사(朴女史)의 비장(悲壯)한 결심(決心)이 이들로 하여금 합치게 했던 것이다. 

오직 잘살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意志) 하나만으로 남편(男便)을 보살피면서, 마당에 울타리를 치고 병아리를 키우기 시작한 박여사(朴女史)는, 피나는 노력(努力)으로 마침내 5,000수(首) 양계장(養鷄場) 주인(主人)으로 탈바꿈할 정도(程度)로 그의 사업(事業)이 번창(繁昌)했으나, 1968년(年)에 불어 닥친 양계부족(養鷄不足) 바람에 또다시 하루아침에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 부부(夫婦)는 5년여(年餘)에 걸친 양계업(養鷄業)을 깨끗이 청산(淸算)하고 다음 사업(事業)을 시작하였는데, 그 사업(事業)역시 닭과 인연(因緣)을 맺어야 할 달걀장수였다. 

박여사(朴女史)는 매일(每日) 새벽 남편(男便)과 계란 50판(板) 정도(程度)를 휠체어에 싣고 행상(行商)길에 나섰다. 

매일(每日)같이 새벽 5시(時)에 일어나 아이들의 식사(食事)를 챙겨 놓고, 하루 평균(平均) 30~40리(里)길을 돌아다니면서 행상(行商)을 하다보니, 피로(疲勞)에 지쳐 쓰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박여사(朴女史)는 이 길만이 살 길이라고 다짐하면서 내일(來日)의 행복(幸福)을 위해 오늘의 고달픔을 참고 이겨 나갔다. 

'계란 아저씨와 계란 아줌마'라는 별명(別名)이 붙을 만큼 이들의 행상(行商)은 순풍(順風)에 돛을 단 듯 잘 풀려 나갔다. 

달걀 행상(行商) 23년(年), 마침내 박여사(朴女史)는 오랜 숙원(宿願)이었던 논 3,000평(坪)과 밭, 1,000평(坪)을 사들이는 알부자의 꿈을 이룩하였고, 지금은 4남매(男妹)를 알뜰히 키우면서 행복(幸福)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더우기 장남(長男)과 장녀(長女)도 이제 부모(父母)님의 뒷바라지에 나섰고, 국민학교(國民學校)와 중학교(中學校)에 다니는 자녀(子女)들도 효심(孝心)이 지극(至極)하여, 1976년(年)과 1977년(年) 어린이날에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의 선행상(善行賞)을 받기도 한 모범학생(模範學生)으로 성장(成長)하였다. 

계란 행상(行商) 23년(年)만에 전답(田畓) 4,000평(坪)을 사들이고 자녀(子女)들까지 훌륭하게 자라자, 영천읍민(永川邑民)들은 한결같이 이들 부부(夫婦)야말로 인간승리자(人間勝利者)이며 전체(全體) 읍민(邑民)의 귀감(龜鑑)이라고 감탄(感歎)해 마지않는다. 

이들 부부(夫婦)는 "사람은 오직 본심(本心)대로 노력(勞力)하면 반드시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고 말하면서, 오늘도 변함없이 휠체어에 계란과 몸을 담고 거리에 나섰다." 인내(忍耐) 바로 이 두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삼고 있다는 열녀(烈女) 박여사(朴女史)는 누가 보아도 인간승리(人間勝利)의 기수(旗手)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