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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鄭淑姬) 여사(女史)는 19세(歲) 되던 해 결혼(結婚)하여 시가(媤家)의 어려운 생활(生活)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으로 이겨내면서, 시부(媤父)님께 효심(孝心)을 다 바치는 근래(近來)에 보기드문 효부(孝婦)이다.
당시(當時)의 가산(家産)은 밭 500평(坪)이 전부(全部)였고, 쫓기는 생계(生計)를 매우기 위해 품삯일로 그날 그 날을 하루살이처럼 연명(延命)해 가고 있는 그런 딱한 형편(形便)이었다.
가난 못지않게 또 하나의 고질(痼疾)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每日)같이 만취(滿醉)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시부(媤父)님의 딱한 모습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할 정도(程度)로 때로는 더러운 도랑에 빠져서 돌아오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술을 토(吐)해서 옷에다 지도(地圖)를 그려서 집에 들어오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지만, 정여사(鄭女史)는 짜증은커녕 오히려 상냥한 미소(微笑)를 지으면서, 밤늦게까지라도 부엌에서 옷을 깨끗하게 빨아 말려 갈아 입게 해 드리는 등 정성(精誠)을 다 바쳐 시부(媤父)님을 봉양(奉養)하였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낮에는 힘겨운 농사(農事)일과 남의 집 품삯일로, 그리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시부(媤父)님과 자녀(子女)들을 보살피며 그런 대로 가난을 극복(克服)해 나갔다.
낮과 밤을 구별(區別)하지 않고 열심(熱心)히 일한 정여사(鄭女史)는, 마침내 얼마간의 논도 사들여 희망(希望)에 부푼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어느 날 "논밭을 모두 팔아서 새 행복(幸福)을 사야겠다."는 남편(男便)의 느닷없는 제담(提談)에 정여사(鄭女史)는 한사(限死)코 반대(反對)했지만, 끝내 남편(男便)은 전답(田畓)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쿠웨이트로 돈 벌러 간답시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렸다.
순간(瞬間) 정여사(鄭女史)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絶望感)에 빠져 통곡(痛哭)도 해 보았지만, 이미 '사또 떠난 후에 나팔 부는 격(格)'이었다.
남편(男便)이 없는 가정(家庭)을 지키며 다시 원점(原點)에 돌아온 그는, 또 다시 품삯일과 삯바느질 등을 하면서 열심(熱心)히 살아갔다.
시부(媤父)님은 이제 완전(完全)히 알콜 중독자(中毒者)가 된 듯 더욱 술을 가까이 하면서, 정여사(鄭女史)의 괴로운 심정(心情)에다 불을 더 크게 질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정여사(鄭女史)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시부(媤父)님을 이해(理解)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효(孝)의 길을 충실(忠實)히 걸어갔다.
지금껏 25년간(年間)을 한결같이 정성(精誠)들여 시부(媤父)님을 봉양(奉養)해온 정여사(鄭女史)는, 어느날 갑자기 폐인(廢人)이 되다시피 해서 불쑥 나타난 남편(男便)을 얼싸안고 자신(自身)도 모르게 "다시는 제 곁을 떠나진 말아요!"하면서 울부짖었다.
주태백(酒太白)이라는 별명(別名)으로 오늘도 만취(滿醉)가 되어 집에 들어선 시부(媤父)님과 폐인(廢人)이 되다시피 해서 귀가(歸家)한 남편(男便), 지금 정여사(鄭女史) 앞에서 서글프기 짝이 없는 시부(媤父)님 부자(父子)만이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해바라기처럼 밝았다.
"아버님, 여보, 우리 다시 한 번 용기(勇氣)를 내어서 새 출발(出發)을 해요."하는 그의 얼굴은 비장(悲壯)하기만 하였다.
그의 정성(精誠)이 오죽했으면 술고래 시부(媤父)님과 폐인(廢人)이 되다시피 한 남편(男便)이 그의 앞에서 감동(感動)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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