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김수자(金守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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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문경군 점촌읍
효부(孝婦) 김수자(金守子) 37세

김수자(金守子) 여사(女史)는 그의 나이 19세(歲) 때 박영창(朴永昌氏)와 결혼(結婚)하였는데, 당시(當時) 시가(媤家)에서는 시부(媤父)님과 시(媤)동생 3명(名)이 그를 맞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시가(媤家)의 생활수단(生活手段)은 시부(媤父)님이 남의 집 변소(便所)를 쳐 주고 받은 수고비(手苦費)로 근근 끼니를 이어가고 있는 딱한 가정(家庭)이었다. 

남편(男便)도 별달리 하는 일이 없이 가계(家計)가 쪼들리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가정(家庭)은 무난(無難)하였다.

그런 어려운 살림을 정성(精誠)과 슬기로 다스려 나가고 있는 며느리의 효심(孝心)에 감동(感動)한 시부(媤父)는, 한동안 며느리의 체면(體面)도 있고 해서 오염수거(汚染收去)하는 일을 삼갔다가, 며느리 몰래 읍내(邑內)에 나가서 다시 남의 집 변소(便所)를 쳐 주는 일과 잔심부름을 하는 등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몇 번씩 모시고 와서 말렸지만 시부(媤父)님의 고집(固執)은 꺾을 수 없었으며, 오물(汚物)에 얼룩진 시부(媤父)님 옷을 세탁(洗濯)할 때마다 김여사(金女史)는 남몰래 눈물지으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로부터 몇 년후(年後) 광업소(鑛業所)에 다니면서 집안 일을 돌보던 남편(男便)이 지병(持病)인 위장병(胃腸病)으로 실직(失職)을 하게 되자, 그의 생활(生活)은 마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더욱 압박(壓迫)을 받게 되었다. 

그 때 김여사(金女史)는 비장(悲壯)한 각오(覺悟)로 굳은 결심(決心)을 했다. 

'시부"님이 하시던 일을 내가 대신(代身) 지게를 지고 해야겠다. 여자(女子)라고 못할 것이 뭐 있겠나' 

다음 날부터 김여사(金女史)는 지게에다 분뇨(糞尿)통을 메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주택가(住宅街)의 변소(便所)를 쳐 주기 시작(始作)했다. 

그러자 그를 목격(目擊)한 시민(市民)들은 한결같이 "정말 장(壯)한 여자(女子)다. 세상(世上)에 저럴 수가..."라고 말하는 감동(感動)의 찬사(讚辭)를 보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남자(男子)도 아닌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그것도 대소변(大小便)만을 수거(收去)하는 밑바닥 직업(職業)에 종사(從事)하면서도 한 점(點)의 부끄러움 없이 해 내고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비단 생계(生計)를 위해서만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家庭)에 돌아와서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며느리로, 또한 남편(男便)에 대(對)해서는 어진 아내로, 그리고 시(媤)동생들에 대해서도 존경(尊敬)받을 수 있는 형수(兄嫂)로서 그의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다. 

특(特)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男便)의 병(病)을 정성(精誠)껏 간호(看護)해 주고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내 병(病)이 나으면 당신을 업고 우리 마누라 만만세(萬萬歲)를 불러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男便)의 이 한 마디에 눈시울을 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효부(孝婦)이면서 열녀(烈女)이기도 한 김여사(金女史), 언젠가는 하늘도 감동(感動)을 하시어 그에게 달덩이 같은 훈장(勳章)을 내려 주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