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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근(金乙根) 여사(女史)는 남편(男便)과 결혼(結婚)한 것이 아니라 가난과 결혼(結婚)했다 할 정도(程度)로, 시가(媤家)는 오막살이 초가(草家)한 간(間)이 남편(男便)의 전재산(全財産)이었다.
농촌(農村)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답(田畓) 한 평(坪)없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가난이 신혼초기(新婚初期)부터 그의 두 어깨를 눌렀다.
시모(媤母)님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그로서는, 차마 조석(朝夕)으로 꽁보리밥과 국수만을 밥상에 올려 놓을 수가 없어서, 그 자신(自身) 노동(勞動)판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남의 집의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도와 주면서, 여기서 얻은 밥과 부식(副食)으로 끼니를 이어 가기도 하였다.
품팔이를 하고 있는 남편(男便)과 아무리 발버둥치며 열심(熱心)히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느덧 그에게도 3남(男) 1녀(女)의 자녀(子女)들이 생겼는데, 비참(悲慘)한 생활(生活)은 끈덕지게도 그의 가정(家庭)을 뒤따라 다녔다.
엎친 데 엎친 격(格)으로 남편(男便)마저 병상(病床)에 눕게 되니, 이제 김여사(金女史)가 여가장(女家長)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앞으로 살아갈 일이 정말 막막(漠漠)하기만 하였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일도 급박(急迫)했지만 남편(男便)의 병(病)을 완치(完治)시키는 일이 더 다급(多急)한 일이어서,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 막약(漠藥)과 신약(新藥)을 사다가 복용(服用)시켰다.
온갖 노력(努力)과 정성(精誠)을 쏟아 남편(男便)의 건강(健康)을 다시 회복(恢復)시켜 보려고 모진 애를 써 보았지만 병세(病勢)는 더욱 악화(惡化)만 되어 가고,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눈덩이처럼 부풀어만 갔다.
그러한 곤경(困境) 위에, 이번에는 또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남편(男便)과 나란히 한 방(房)에 눕게 되었다.
겹치는 가난에다 두 사람의 중환자(重患者)까지 돌보아야 하는 김여사(金女史)는, 숨막히는 현실(現實)을 원망(怨望)할 겨를도 없이 그 날부터 두 사람의 환자(患者)를 번갈아가면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 극진(極盡)히 간호(看護)하는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쏟았다.
그러나 남편(男便)은 아내의 따뜻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없이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이에 대(對)한 충격(衝擊)으로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는 급격(急激)히 기울어져만 갔다.
막상 남편(男便)이 세상(世上)을 떠나고 나자, 집안은 더욱 허전했고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눈물만 흘리고 있을 처지(處地)는 더욱 못되었다.
실의(失意)와 절망(絶望)을 도리어 새 출발(出發)의 디딤돌로 삼고 다시 일터를 찾아나선 김여사(金女史)는, 다음 날부터 더욱 열심(熱心)히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모(媤母)님 병간호(病看護)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힘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지칠 대로 지쳐서 그 자신(自身)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시모(媤母)님 앞에서는 조금도 그런 내색(內色)을 하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간호(看護)에 임(臨)하고 있다.
"조상(祖上)에게 감사(感謝)하는 마음, 부모(父母)의 은혜(恩惠)를 생각하고 효도(孝道)하는 마음이 생활화(生活化)될 때 가정(家庭)도 건전(健全)해지고 사회(社會)도 명랑(明朗)해진다."고 말하는 김여사(金女史), 오늘도 그런 효(孝)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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